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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전쟁'에 기반을 둔 문화와 그것이 우리 심리에 끼친 상처의 자각을 검증하지 않고 단지 내면의 그림자로 가만히 두는 것을 일상화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종종 전파를 타고 '민간인 학살'이나 '내전'이라는 국제뉴스를 들으면서 우리 사회와는 무관한 그래서 단지 미디어나 영화를 통해서, 그리고 이제는 뉴스나 게임을 통해서만 정보를 얻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그러한 '내전'과 '민간인 학살' 아니, 이번 이라크전쟁에서도 보여주듯이 심리적 공황이나 불안 그리고 스트레스를 극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이번 전쟁을 치룬 이라크 국민들과 미군들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미디어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숱한 분쟁과 대립으로 인해 그 상처가 치유되고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폭력은 과연 그냥 놔두면 저절로 치유되는 것일까?


전쟁에 관한 심리적 외상, 세 가지 사례


하나. 지난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나서 미101공중강습사단 숙영지에서 아군에 의해 발생한 수류탄 공격사건으로 이 부대원들의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있다고 미 군사전문지가 보도했다. 그 보도에 의하면 용의자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전장에 배치되면서 비롯된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며, 전쟁처럼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억눌렸던 분노가 스트레스로 인해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분석했는데 놀라운 것은 어느 누구도 지금 그들이 처한 심리적 상태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둘. 이라크 전쟁이 개시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쿠웨이트 어린이들이 심리적으로 이상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KUNA통신이 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지속된 미사일 공격으로 어린이들이 이미 악몽에서 식욕부진, 신경과민, 설사와 야뇨증 등의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인데 심리학자인 카딤 아불은 어린이들이 쉽게 놀라기 때문에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전쟁관련 장면들을 보지 않아야 하며 그 같은 장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정신이상 반응을 보이거나 심리적인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또한 '워차일드'(Warchild)라는 인권단체는 미국의 침공이 있기 전 심리학자가 포함된 조사단을 이라크 현지에 파견, 이라크 어린이들이 심각한 전쟁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전쟁발발 시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 십만 명의 어린이가 희생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셋. C. R. 피글 리가 편집한 <베트남전쟁 신경증>에 '베트남전쟁 후 증상군'이라 불리는 정신상태, 증상, 사회문제가 나타나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전선이 불명확했던 베트남의 전쟁터에서 일어난 잔학행위에 대한 죄책감, 후방에서 기준으로 삼았던 기본 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비행-헤로인 중독, 성의 남용, 폭력-에 대한 죄책감, 전우를 버렸다는 죄책감, 나보다 뛰어난 자는 죽고 자신이 살아남았다고 하는 죄책감. 자신들을 전쟁터로 보낸 국가, 사회, 아내에게 배신당했다는 원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 컨트롤 불가능한 적의와 아무에게나 분별없이 치솟는 격분, 그리고 폭력의 허용. 강박적으로 덮치는 어지러운 장면들, 악몽, 야간경비, 그리고 플래시백의 체험. 살아 숨쉬는 감정을 잃고 무관심과 억울상태에 빠진다. 불면, 불안, 지각과민, 착란. 인생목표의 상실. 실업. 자살. 살인. 교통사고." 또한 1996년 체첸 전쟁에서 귀환한 러시아 병사는 낮에도 그 전쟁에 있었던 처참한 광경을 떠올렸는데 "1개월 정도는 누가 병실을 노크하면 침대 밑으로 숨으며 총을 찾기도 했다. 자동차 소음이 들려도 공격자세를 취했다. 지금도 소독액 냄새가 나면 불안해진다"라며 이른바 플래시백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전쟁'의 잔혹성에 대한 받아들임은 문화에 따라 달라


이렇듯 전쟁이란 흔히 게임세대들이 네트워크전쟁을 하며 관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처럼 '영웅적인 죽음'으로 포장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헐리우드식 영웅주의 영화나 반공의식에 젖은 사람들처럼 정상적이고 건강한 남성의 죽음을 관념적으로 미화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관념의 전쟁'을 설파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이라크 전쟁과 파병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아직도 평화와 비폭력의 화두를 '비현실적인 이해'라고 비판하는 '전쟁을 옹호하는 관념들'이 굳건해 보인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노다 마사아키라는 일본의 정신의학자는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을 이야기하면서 그 중에 일본 군대라는 하나의 시스템이 어떻게 단순한 청년을 살인 수행의 부품으로 변화시켰는지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특히 '전쟁은 인간을 잔혹하게 만든다'라는 전쟁 옹호의 현실주의자들의 일반화에 대해서 이와 같은 통념은 사고의 태만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고 이러저러한 구체적 전쟁이 있고, 그에 따라 각각의 군대가 있으며, 그런 구체적인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잔혹해진다고 말하고 있다. 즉 소속 집단에 적응하고자 하는 노력, 그리하여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마음-일본형 상승의식-이, 사람들을 잔혹성을 느끼지 못하는 살인기계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문화와 시대가 현실과 국익을 위해 내세우고 있는 '전쟁의식'은 인간에 대한 일반화가 아니라 단지 시스템에 대한 순응, 복종으로의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욱 더 문제삼고 깊은 논의로 되돌아봐야 할 것은 결국 전쟁이라는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인데 모든 나라의 병사가 학살과 침략전쟁의 잔학성에 적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전쟁이란 얼마나 잔혹한지, 잔혹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이라크전쟁 이후, '심리적 상처'는 누가 치유할 것인가


이라크전쟁 이후 많이 언급되는 것은 '이라크재건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 일부 언론도 이라크 재건사업에 뛰어들어 기업이 일정정도의 수익을 얻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라크 전쟁의 잔혹성을 잊고 국민들의 전쟁인식을 마비시키는데 함께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이 전쟁을 정확히 바라보아야 할 것은 '심리적 상처'와 '정신의 황폐함'이다. 물론 폭격의 피해를 입은 이라크 국민들은 이후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증세의 심리상태를 보일 가능성이 크고, 거꾸로 지금 미국의 일부 지도부나 국민들은 이러한 폭격을 통해 자신들이 지닌 감정에 대해서도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질서를 가질 경향이 높다. 즉 자신들의 명예나 수치와 관련된 감정은 비대해지는 반면, 자신이나 타인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에는 냉담해지는 정신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리적 상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심리적 상처'는 누가 치유할 것인가.

<전쟁과 인간>에서 홀로코스트를 겪었던 클리모아씨는 "홀로코스트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2세와 3세에게까지 감정장애가 보인다"며 "2세들이 어른이 된 뒤, 정서장애나 억울증에 걸리는 자가 많았고 여전히 우리들은 불안, 불면, 플래시백과 같은 '홀로코스트증후군'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즉 그들이 겪은 고통으로 부자관계는 깊은 감정교류가 없이 그대로 자신들의 감정을 고갈시키면서 지내왔고 그러한 커뮤니케이션 장애에서 얻은 왜곡된 감정들이 지금도 그들의 정서와 심리에 왜곡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상처와 감정적 왜곡이 단지 '유대인'에게만 유독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장애와 정신적 외상은 이후 이라크에서도 앞으로 잠재적 질병으로, 사회적 상처로 파생될 것이며 또 다른 면에서 이러한 물음은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회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전쟁'을 다시 되돌아보는 정신의 힘을 키워야 해


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문명의 잔혹성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어떠한 체험을 했고 무엇을 느꼈는지 조사도, 분석도, 반성도, 성찰도 없는 사회의식과 문화에서 성장해 왔다. 생존과 경쟁의 질서에서 풍요와 경제개발의 미명을 드높이며 우리를 앞으로만 향해가게 하는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6·25를 겪고, 베트남전쟁을 겪고, 광주항쟁을 겪고, 지금 이라크전쟁을 겪으면서 우리의 정신은 온전한지 우리가 이 기간동안 무엇을 했는지, 민간인 학살과 베트남인에 대한 학살에서 우리의 정신구조는 어떠한 상흔을 입었는지에 대한 되돌아봄 없이 오직 경제개발과 풍요라는 '외피'만 가꾸고 돌보면서 달려왔다. 지금 우리 경제와 사회를 일군 세대가 전쟁을 경험하고 그 전쟁의 상처를 내면으로 체화한 이들이라면 그 이후에 태어난 다음, 다음세대 또한 전쟁 혹은 전쟁의 와중에 성장한 세대와 마찬가지라고 노다 마사아키는 지적하고 있다. 즉 '아버지의 전쟁'은 아직 심리적으로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의 정신적 외상이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어진 우리 세대의 사회적 혹은 개인의 심리 또한 깊은 상처를 입고 있으며 여전히 치유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라크 전쟁은 미국 일방의 승리로 종결이 났다. 하지만 그 전쟁과 폭격으로 인해 이라크 사람들이 겪어야 할 심리적 폭격과 전쟁은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려야 사라질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정신적 심리적 외상이 아마 다음 세대의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쳐 '왜곡된 감정'을 계승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전쟁과 폭력에 질문을 던지고 지속적인 되물음을 해야하는 것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에 대한 '무력감'이 가져오는 깊은 상실감을 정확히 직시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개인으로 성장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바탕에서 '심리적 상처'를 성찰하고 '자신의 상처에 대한 자각'과 '타인의 슬픔을 감싸안는 문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는 자각이 이제는 정말 필요하다. 평화는 이제 우리의 내면을 치유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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