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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편지] 정인이에게

여은정( 1) 2003.04.15 16:11 추천:5

참 오랜만에 편지를 쓴다. 그냥 답장 없는 편지를 쓰는 게 재미없어서... 인도에 다녀와서 사진 보내주느라 쓴 것 빼고 이렇게 손으로 쓰기는 오랜만이야.

내가 잠자고, 빨래하고, 책 읽는 곳- 해망동 집(새로 살게 된 곳이야. 정식 주소는 소룡동 몇 번지라는데 난 해망동이라는 이름이 더 좋아. 바닷가 마을 같잖아. 예전에 이곳 까지도 바다였대)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

삼보일배에서 배운 '나를 낮추는 마음'

오늘은 참 심심한 하루였어. 토요일, 월요일날 새만금 3보 1배에 참가하고 사무실에 출근했는데 일이 손에 잘 안 잡히더라구.

새만금 삼보 일배는 스님과 신부님, 목사님, 원불교 교무님 등 환경을 파괴하는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종교계 어른들이 말 그대로 세 번 걷고 한 번 절하면서 서울까지 가는 고행의 길이야.
지난 3월부터 시작해서 스님과 신부님은 서울로 목사님과 교무님은 전북지역을 순례하다가 다시 서울로 가시는 일정이지.

난 지난 주부터 조금씩 함께 걸었는데 참 눈물이 나더라. 절하는 행위 자체가 그러는 것 같아. 나를 낮추고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잖아. 절하는 분들도 그렇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업도 팽개치고 같이 하시는 분들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나도 거기에 계속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

사실 요새 운동에 대해서, 아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좀 피곤함을 느꼈거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서로 상처 받지 않으면서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쩐지 난 그걸 잘 못하는 것 같아. 상대방도 상처받고 나도 상처 받고 말이지.

힘든 '화'내기

운동하면서 배운 의로운 '화' 라는 게 나는 잘 조절이 안 된다. 화 나지 않는 상태, 그런 인간형이 진짜 있기나 할까? 오늘만 해도 그래. 오늘 사무실에 출근해서 보니까 같이 일하는 선배가 사무실에 놔 둔 내 가방을 들고 출장을 간 사실을 알았어. 근데 그 사실을 안 순간 너무 화가 난 거야. 그 선배는 물건을 함부로 쓰거든(물론 이건 내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그 선배한테 전화 해서는 다른 일 있는 것처럼 몇 마디 하다가 끊기 전에 "혹시 내 가방 가져갔어요?" 했더니 선배가 자기 가방을 다른 데 두고 와서 내가 안 쓰는 것 같아서 들고 갔다고 하더군.

음...참 인간이란게 치사하지. 그 얘기 듣고 내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어. 그러면서 그 선배 인간성까지도 생각나는 거야. 그 선배가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그가 인간을 대하는 방식과도 똑같다는... 치사하게도...

언젠가 그 선배가 자신의 상처를 얘기한 적이 있어. 자기 곁에 오래 남는 사람은 없다고, 그건 자기가 못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떠나는 거라고. 그런데 나는 오늘 불쑥 가방 하나땜에 그 선배의 상처와 연관지어 그 선배의 전부를 욕한 거야.

내가 볼 때 자신을 아는 사람은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변화의 가능성이 있고 변하려고 노력중인 사람이야. 그런데 나는 그걸 확인하려 했고 그 기분 나쁨을 어찌됐든 전한거지. 이미 말하지 않았어도 물어본 그 순간 그 선배는 알았을 거야.

생각대로 되지 않는 나, 관계

내 것 네 것 구분이 없는 상태! 남 것도 내 것처럼 쓰고 내 것도 남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내 줄 수 있는 내가 언제쯤 될 수 있을까?

갑자기 이렇게 쓰다보니 또 하나의 일이 생각난다. 언젠가 누구랑 함께 점심을 먹는데 그 사람이 내 음식을 가리키려 나도 좋은 거 먹을래 하는거야. 그 때 내 음식이 특별히 좋지는 않았는데 그 사람이 보기에 내가 먹는 음식이 좋아 보였던 모양이야. 아마도 내가 늘 생태적이고 뭐 이러 저러한 얘기를 하다보니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

암튼 그 얘길 들었을 때 내 느낌은 그랬어. 아, 저이는 나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구나. 내가 그에게는 안 좋은 것을 주고, 난 좋은 것을 먹고 있다는 인상을 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

어느 땐 나도 모르게 무의식에서 내가 옳다고 믿는 걸 얘기하다가 순간 상대방을 움츠러 들게 하는 내 태도를 느끼지. 그럼 그걸 깨닫는 순간에는 '그냥 침묵하자' 하면서 그냥 '나만이라도 지키며 살자' 그렇게 다짐하기도 하고, 그 모습이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하하. 이렇게 쓰고 보니 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며 나를 추스르다가 나를 억압하는 나를 보고는 너무 우스워서 그냥 생긴대로 살지 뭐 하며 맘대로 하다가 늘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나의 삶! 이런 고민을 풀게되면 인생이 좀 편해질까?


2003년 4월 15일 은정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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