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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쌀 개방 참사, 세월호 참사와 같이 정부는 없었다"

[현장] 29일 전북 익산시 춘포면, '논 갈아엎기' 투쟁에 나선 농민들의 마음

문주현( jbchamsori@gmail.com) 2014.07.29 17:10

“쌀 개방 참사, 세월호 참사와 같이 정부는 없었다”

29일 오전 11시 전북 익산시 춘포면 덕실리 들판에 모인 농민들은 하나같이 박근혜 정부의 쌀 개방(관세화)를 참사라고 표현했다. 25년째 익산시 삼기면에서 벼농사를 지어온 김영재(50)씨는 “쌀 개방에 앞서 정부라면 농민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준비를 하고 국민들의 식량 주권이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예방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라면서 “국민의 안전이 뒷전으로 밀리면서 벌어진 세월호 참사보다 더 큰 참사가 쌀 개방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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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농민회가 29일 전북 익산시 춘포면 한 농지를 갈아엎는 투쟁을 벌이며 '쌀 개방 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이어 김씨는 “쌀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의 생존의 문제다”면서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논 갈아엎는 심정 처절하다. 정부에 대한 믿음도 갈아엎었다”

김씨와 같은 전북지역 농민들의 단체인 전국농민회 전북도연맹은 이날 춘포면 덕실리의 1필지의 논(약 1200평, 3960㎡)을 갈아엎었다. 앞으로 2달 후면 추수하게 될 벼들은 아직 푸른빛을 버리지 못한 채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지만, 트랙터 2대는 단 20여 분만에 갈아엎었다. 정부가 지난 18일, 20년 동안 미뤄온 쌀 관세화를 2015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겠다고 밝힌 것이 원인이었다.  

전북농민회 익산시지부 이웅의 사무국장은 “수확만 기다리는 논을 처절한 심정으로 갈아엎었다. 1년 피와 땀으로 일군 곡식을 갈아엎은 마음을 국민들이 알아 달라”고 마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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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농민회가 논을 갈아엎은 것은 지난 2012년 9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당시에는 황금 들판의 고개 숙인 벼들을 갈아엎었다. 당시 태풍 볼라벤으로 발생한 백수피해로 채 여물지 못한 벼들이 포함된 논을 갈아엎었다. 수확을 해도 제 값을 받지 못하는 벼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추수 시기도 아니었다. 쌀 개방을 생각하는 농민들의 마음이 읽히는 대목이다. 춘포면 인근에서 약 40년을 농사지어온 이영희(62세)는 “(쌀 개방 바람이 불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쌀값은 달라지지 않았다. 농사가 너무 힘들다. 요즘 같으면 모르는 사람 밥 한 끼도 못 준다”며 농민 특유의 인심도 잃어가고 있다고 한탄했다. 

농민들이 잃은 것은 인심만이 아니다. 쌀 개방 발표를 무기력하게 한 정부에 대한 신뢰도 함께 잃었다. 지난 18일 정부는 쌀 관세화 선언을 하면서 “관세화를 유예하는 대가로 지난 20년 동안 매년 증가해온 쌀의 의무수입물량은 국내 쌀 수급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면서 쌀 개방이 불가피한 시점에 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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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을 갈아엎는 동안 농민 약 300여 명은 '농민가'를 부르며 정부의 쌀 개방 방침을 막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쌀 개방, 농민들의 마지막 보루인 쌀마저 포기하겠다는 것” 

익산시 오산면에서 30년 동안 농사를 지어온 오상노(56)씨는 정부의 쌀 개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에 대해 “역대 정부들도 정권을 지키기 위해 농업을 이용만 했지 다가올 쌀 개방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서 “농민들은 약 30년 동안 수입개방을 막고 대책을 요구했지만, 이번 쌀 관세화 선언으로 농민들의 마지막 보루인 쌀마저 포기하겠다는 답을 했다. 앞으로 다가올 도하개발아젠다(DDA),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국제무역기구(FTA) 협상에도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앞서 만난 김영재씨도 의견이 같았다. “필리핀 등과 같이 협상카드로 쓸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열어야 한다면 최소한 싸워는 봐야하지 않나. 싸워보지도 않고 쌀 개방을 말하는 것을 불 때 이 나라에 정부는 없는 것 같다”고 강한 어조로 표현했다. 

정부의 농민 보호 대책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농민들은 갈아엎은 덕실리의 논과 마주보고 있는 과수 재배 유리온실을 가리키며 이유를 설명했다. 

“유리온실들은 대부분 농업 자본들이 수십억의 보조금을 받아 만든 것들이다. 농업 피해 보상금이나 농업 예산이 대부분 이런 곳에 들어가지 농민들에게 돌아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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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무기력한 농업정책에 항의하며 농민들은 농림부장관을 상질하는 허수아비를 불 태우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생산비를 보장하는 농산물 없다. 식량주권도 위험하다”

전북농민회는 ‘쌀 개방 반대! 논 갈아엎기 및 하반기 투쟁선포식’을 같은 자리에서 개최했다. 조상규 전북농민회 의장은 “계속되는 농업 시장 개방에 농민들은 몰락했다. 생산비를 보장하는 농산물은 단 하나도 없다”면서 “정부가 농민들의 간절함과 눈물을 외면한 채 쌀 개방 선언을 했다. 전체 농업의 60%를 차지하는 쌀 시장을 개방한다는 것은 농민을 포기하겠다는 것이고 식량주권을 포기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식량주권 사수를 위해 투쟁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전북농민회는 논평을 통해 “마지막 싸움이라는 결의로 식량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겠다”면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서 시작해 우루과이라운드(UR), 국제무역기구(WTO), 자유무역협정(FTA),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까지 수 십년간의 농업학살에도 굳건히 투쟁해왔다. 세상을 갈아엎는 투쟁으로 한꺼번에 되찾아올 것이다”고 투쟁 결의를 밝혔다. 

앞으로 전국 농민회는 9월 18일 대규모 투쟁을 기획하고 있다. 이날 논 갈아엎기는 하반기 투쟁의 각오를 밝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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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민이 쌀 개방 반대 깃발을 들고 멀리서 논 갈아엎기 투쟁을 지켜보고 있다.

한편, 춘포면은 일제시대 호소가와라는 일본인 대지주에 의해 수탈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 자리한 춘포역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춘포를 중심으로 익산지역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지어졌다. 호소가와는 일본 구마모토현 출신으로 1904년 조선에 진출하여 당시 자금 1만원을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250만평에 달하는 농지를 소유했다. 

한 세기 전 선배 농민들이 일본인에 의해 수탈의 아픔을 겪었다면 그 후손들은 쌀 개방 앞에서 생존권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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