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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버스 건으로 수배생활도 벌써 석달여째, 한진중공업 문제는 풀릴 기미가 잘 보이지 않아 그렇잖아도 잠을 잘 못 드는데 어젠 부스스 아침에 깨어나, 가슴이 무너지며 서글픈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들어야 했다.

아,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어디 남겨둔 술이라도 한잔 없나. 아침이건만 쓰고 독한 어떤 맛이 그리웠다. 이렇게 위대했던 한 세월들이 저무는 것인가. 하나의 산맥들이 무너져가는가, 하나의 들녘들이 저물어가는가. 하나의 장엄한 이야기들이 흐트러져 가는가.

이제 어디에서 전체 노동자들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이제 어디에서 그 꼼짝 못할 불호령을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미천한 나도 어머님의 품 안에서 잠깐씩 일을 거든 적이 있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 일이 그것이었다. 고생하던 명환이형, 한주형을 도와서였다. 그 마당이 어딘 줄도 모르고 까불고 다니기도 했다.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사업을 제안하고는 전설 같은 청계피복노동조합 전사 선배들을 만나 그 뒷이야기들을 듣기도 했다. 벗인 오도엽이 근 2년을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넉살좋게 양아들 역할을 하던 때 끼어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머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작은집마냥 이야기되던 <박영진열사추모사업회> 일을 몇 년 따라하며 늘상 어머님 근황을 전해 듣곤 했다. 2008년 기륭전자비정규직 투쟁을 할 때엔, 힘들 때마다 어머님을 모시곤 했다. 김소연이 공장 옥상에 올라가 무기한 단식을 할 때, 득달같이 찾아오셔서 위험한 물건을 빨리 내놓으라며, 내놓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눌러앉은 어머니를 보며 골목길 사이로 들어가 얼마나 내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는지 어머님은 아실까.

하지만 나는 어머님을 따로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고향의 내 어머니를 대하듯, 그렇게 언제나 든든하게 저 하늘에 계실 거라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낱낱이 나뉘어 단결하지 못하고 흩어져도 늘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어머니가 계실 거라고 생각했다. 이 땅에는.

그런데 이제 그 어머님이 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청계피복 재단사들과 미싱사들, 그리고 시다들의 어머니였던, 그 분이 떠나셨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어머니를 넘어 만인의 어머니로 서셨던 그 분이 떠나셨다고 한다. 한 가녀린 여인이 떠났다고 한다. 한 한많은 인생이 떠났다고 한다.

나는 왠지 하나의 동산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하나의 달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간신히 부여잡고 왔던 하나의 시대를 잃어버린 느낌이다. 한동안 다시 빛이 없는 어둠 속을 걸어야 할 것이라는 아픈 생각이다. 시대의 어른들이 한 두분씩 가시지만 새로운 어른들은 잘 세워지지 않는 이 자본의 일상이, 이 온건한 폭압의 일상이 두렵다. 이제는 더 이상 노동자들의 벗이 아니지만 나도 한때 어머니의 자식이었다고 찾아오는 이들의 면면이 두렵다. 어제도 그제도 강정에서, 영도에서 거리에 차벽을 세우고, 물대포를 쏘고, 사람들을 짓밟아놓고, 버젓이 화환을 보내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들의 하수인들과 불안한 동거를 해야 하는 이 시대가 두렵다.

하지만 우리는 어머니의 생을 기억한다.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어떤 탄압과 회유와 좌절스런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의 편에 확고하게 서왔던 어머니의 삶을 기억한다. 진정한 어른들의 시대를 기억한다. 아름답고 존엄했던 인간들의 시간을 기억한다. 어떤 방패막이 없어도, 어떤 그늘이 없어도, 폭압의 뙤약볕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가고, 어른들이 되어갔던 시대를 기억한다. 우리가 다시 그러해야 함을 기억한다. 더 아름답게 즐겁게 그 삶의 역사들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런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이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영도를 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유가족인 전태삼 선생은 '어머니가 최근에 한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머니가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죽지 말라고 했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라며 "살아서 함께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자고 하셨는데...”라고 전했다고 한다. 실제 어머님은 1차 때 이미 희망의 버스를 타려고 하셨지만 기념재단 실무자들이 건강을 염려해 만류하셨었다. 주변을 나무라시며 2차 때는 꼭 갈란다 하셨지만 갑자기 쓰러지시고 말았다. 전태삼 선생은 어머니께서 중환자실에 계실 때 중간에 잠깐 의식이 들었을 때 이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소금꽃나무'는 제2의 전태일 평전이라고 해도 아무런 가감이 없다

생각해보니 김진숙의 삶은 굳이 그런 비교가 필요 없지만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닮아도 많이 닮았다. 입학실날 교복이 없던 아이, 육성회비가 없어 쫒겨나던 아이, 형편이 안돼 학교를 그만두고 15살에 가출한 소녀. 해운대 백사장을 돌며 행상을 했던 삶도 닮았고, 미싱공도 아닌 ‘시아게’로 일하던 삶이 닮았다. 화진여객 128번 버스 안내양을 하던 삶이 닮았다. 청계천의 시다들을 위해 빵을 사주고 자신은 걸어걸어 집으로 가던 전태일의 마음을 닮았다. 배운 것 없지만 일기쓰듯 꼬박꼬박 글을 썼던 그 마음의 결들이, 사람의 마음들이 닮았다. 정말 그러냐고, 다음 글을 보라.

“길쭉한 방은 열댓명이 누워자면 팔이 꼭 끼어, 잘 때는 팔에 지퍼를 달아 떼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날마다 할 정도로 비좁았다. 옆으로 돌아누우면 자리가 더 좁아져 다시는 바로 누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좀처럼 돌아눕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 신발장도 방에 있었고, 세숫대야, 수건, 칫솔 등 젖은 물건으로 늘 축축하던 방에는 빈대가 들끓었고,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오사리 잡탕들이 모여 있던 그 방에는 청운의 꿈이 슬라브벽에 얼룩진 빈대 핏자국처럼 흔적만 얼룩덜룩 남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몸을 긁적이면서도 빈대가 득실거리는 담요를 서로 잡아당기며 짧고 고단한 청춘을 빈대에 피를 빨리듯 사그라뜨리고 있었다.”

“100원짜리 옥수수 식빵을 사다가 밤중에 이불을 덮어쓰고 쥐새끼처럼 빵을 파먹던 성자, 태숙이들. 자면서도 “잘못했으예.” 잠꼬대를 하며 흐느끼던 영숙이, 미순이, 상남이들. 설날 보온밥통 선물을 들고 모처럼 뿌듯하게 찾아간 고향집 아랫목이 너무 따뜻하고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휴가 지나고도 이틀을 더 눌러앉았다가 출근하자마자 유리성 안에서 뺨이 붓도록 얻어터지고 “엄마, 회사가 무섭다.” 밤새 눈물로 편지를 써 놓고는 부치지 못한 채 그 무서운 곳으로 날마다 향하던 어린 옥선이, 태자, 미숙이, 딸끔이들. 결국 난 그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되어주지 못한 채, 내 스스로에게도 아무것도 되어 주지 못한 채 짐가방보다 더 큰 설움과 두려움만 한 보따리 안고 그곳을 나와 해운대 백사장의 아이스크림 장사, 신문 배달, 우유배달 등으로 전전하게 된다”
- 「그 시절의 이력서」 중에서(『소금꽃나무』)

사실 난 윗 글을 1997년에 만났었다. 이 글을 만났을 때의 전율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잠깐 이게 전태일 열사의 일기인지, 김진숙이라는 한 여성노동자의 글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전태일문학상에 보내주었던 글이었는데, 어떤 까닭인지 뽑히지 않아 당시 만들고 있던 노동자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창간호에 이 글을 허락을 받아 실었었다. '소금꽃나무'는 제2의 전태일 평전이라고 해도 아무런 가감이 없다.

이소선 어머님께서 꼭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영도에 가려했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꼭 살아서 투쟁하라고, 딴맘 먹지말고 잘 이겨서 건강하게 내려오라고, 이기지 못하더라도 김소연을 끌어내리려 하듯, 김진숙과 그 동료들을 끌어내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직도 눈 뜨면 허공 중에 떠돌 자신의 아들 전태일을 이 생으로 끌어내리고 싶듯, 어머니는 영도엘 가서 김진숙과 그 동료들을 붙잡고 울고 싶으셨을 것이다.

어떤 게 어머님을 위하는 길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게 김진숙을 위하는 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어머님의 마지막 소망이셨던, 늘 그 길, 노동자민중들을 위하는 길 밖에 없었던 어머님의 마지막 길을 원없이 보내드리기 위해, 마지막 소원이셨던 ‘희망의 버스’에 어머니의 고귀한 넋을 실고, 부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앞으로 간다. 어머님께 더 나은 세상, 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안겨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지 못한 이 죄송함을 담아 간다. 이 억울함을 담아 간다. 이 눈물들을 담아 간다.

우리가 꼭 김진숙과 그의 동료들을 살려 어머님 걱정 풀어드리겠다고, 우리가 어머님께서 다녀가신 그 길 이어 평범한 이들의 생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 만들겠다는 다짐을 안고 간다. 이렇게 완강하고 건재한 시대의 투쟁들이 있으니, 이렇게 굳건한 연대의 마음들이 살아 있으니, 이렇게 발랄한 시대의 상상력들이 살아 있으니 걱정마시고, 염려 푸시고 훨훨 우리들의 어머니 잘 가시라고, 하나의 시대여! 잘 가시라고 마지막 여행 보내드리려 간다.

그 마지막 여행길에 여러분들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다. 범국민추모위원회에서도 이 길을 허락해주셨다. 공동장례위원장인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과 박창수열사 아버님, 그 외 여러 어른들이 함께 하신다고 한다. 무엇보다 어머니께서 사랑하셨던 노동자 동지들이 많이 가주었으면 좋겠다. 이 시대의 양심들이 많이 가주었으면 좋겠다. 어머님의 그 힘으로 지금 많이 외로운 저 85호 크레인 위의 다섯 명의 전태일들이 하루속히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기도 간절히 소망해본다.

그 날이 오면 나도 85호 크레인 사람들과 함께 맨 먼저 어머님의 묘소를 찾아뵙고, 어머님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시던 소주 한잔과 담배 한 개비 올리고 싶다. 부끄러운 눈물 한 자락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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