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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건강이야기]소비되는 의료, 창조하는 건강

강신익( 1) 2004.05.26 14:27 추천:3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은 1997년 현재 73세에 이른다. 1960년에 55세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18년을 더 살게 된 것이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수명은 1840년 이후 매년 3개월씩 증가해 왔으며, 이런 추세대로라면 모든 사람이 100세까지 살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한다.

평균수명의 증가현상은 주로 영아사망률의 극적인 감소와 폐결핵 등 감염성 질병을 극복할 수 있었던 데 그 주요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영아사망률이 감소했다는 것은, 출생이라는 사건이 산모와 아기 모두에게 그다지 위험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는 걸 의미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공을 현대의학의 발달에 돌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렇다면 현대의학의 중심지이며 국민총생산의 14%라는 막대한 비용을 의료비로 지출하는 미국의 유아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하지만 UNICEF가 1996년에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유아사망률은 산업화된 서구 국가 중 25위라는 치욕적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폐결핵 등 감염성 질병에 의한 사망이 크게 줄어든 원인에 대한 분석에서도 현대의학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19세기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의 주요 원인별 사망률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폐결핵과 백일해, 홍역 등 감염성 질병에 의한 사망은, 항생제가 발명되고 백신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극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회의학자들은 출산과 감염성 질병에 의한 사망이 줄어든 요인으로 위생과 영양 상태의 개선, 빈곤의 퇴치 등 비의학적 요인을 꼽는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평균수명이 연장된 것은 질병의 원인균을 발견하고 그것을 죽일 수 있는 항생제를 발명한 의학자의 덕이라기보다는, 수도관을 교체하고 과도하게 밀집된 주거환경을 개선하며 빈곤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정치가와, 모성보건에 관해 헌신적으로 교육한 간호사나 교사의 덕으로 돌려야 한다.

그렇다고 현대의학이 우리의 건강에 기여한 바를 과소평가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피부에 난 종기 때문에 죽지도 않고, 당뇨병 환자라도 인슐린을 투여하기만 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며, 신부전 환자라도 정기적으로 투석치료를 받거나 신장이식수술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건강한 삶을 되찾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구매하기만 하면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막연한 정서가 만연해 있다는 데 있다. 매스미디어는 연일 무병장수 시대를 말하고, 의료산업은 이렇게 만들어진 상징을 이용해 각종 건강상품을 생산하며, 대중은 무비판적으로 그것을 소비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발표되는 의학상의 주요 발견은 대부분 임상적으로 별 효용이 없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당장이라도 커다란 진전이 있을 것처럼 호들갑이고 산업체는 발 빠르게 그것을 상품화하며, 기대를 키운 환자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일선의 의사에게 실망한다.

하지만 성형수술의 횟수가 아름다움의 척도가 아니듯이 의료서비스의 소비 정도가 건강의 기준일 수는 없다. 건강은 나 혼자의 '재산'이 아니라 내 가족과 직장, 그리고 사회가 함께 만들어 가야할 '가치'이고 과정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보건의료정책도, 기왕에 생산된 의료서비스를 분배하고 소비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건강을 '만들어' 나가는 방향으로 바뀌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 강신익 /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의철학
- 월간 <열린전북> 200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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