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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외견문록]독일한인사회의 형성

이병렬( 1) 2004.05.12 17:28 추천:7

금년 갑신년의 새해를 맞이하는 구정 설날에는 날씨도 71년만에 강추위가 몰아쳤고 눈도 많이 왔다. 2002년 겨울 하이델베르그에 가까운 슈파이어 행정대학원에서 객원교수로 있을때 독신자 기숙사에 있었다.

독일에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와 한국소식을 접해보면 한국도 거의 같은 날씨여서 고국에 있는 분들과 같은 정서를 교환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시민들이 크리스마스 오랜 기간 축제 때문에 긴 휴가를 떠나서 학교식당, 슈퍼마켓 등이 문을 닫기 때문에 비상식량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상가에서 10여일의 먹을거리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기숙사를 쳐다보니 전체가 불이 꺼져있고 내방만 불이 켜져있어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한인회장한테 전화를 걸어 연말 한인회행사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였더니 쾌히 승낙해주었다.

이때부터 김치와 한국음식, 고국소식과 향수를 즐기는 기회의 계기가 되어 독일 30여개도시를 순방하면서 많은 한국인들과 한독가정, 한인회행사에 참여하였다. 여기서 한인회와 한국인들이 독일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을 갖고 본 독일 한인사회와 재독 호남향우회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독일 한인이주의 정착

독일은 8천3백여만명의 인구가 있는 유럽의 대국이다. 현재 10%에 달하는 터키계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하고 있으나, 이들을 제외하면 순수 독일민족인 게르만족이 전인구의 99%를 차지하고 있는 단일민족이다. 터키계를 제외한 외국인이 전 인구의 1%, 즉 80여만 명에 불과하다. 한국 동포가 1만 7천 명에서 4만 명 정도 살고 있다. 이들 중에는 독일국적을 취득한 자가 약 5천 명에 이르고 있다.

독일의 극동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일방적인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외교적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880년대였다. 1876년 2월 26일 비로소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오랜 쇄국의 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5월 29일 한국 최초의 대사가 일본 횡빈(橫濱)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일본에 있는 많은 서양국가 외교관들의 통상요구를 모두 거절하고 6월 28일 귀국하였다. 다시 4년간 오로지 일본과만 외교관계를 가졌다가 1880년 5월 14일 슈펠트(Schufelt)제독이 미국군함 Ticondroga호를 이끌고 부산에 도착해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돌아갔다. 1881년 일본에 있는 청국공사관의 황준헌(黃遵憲)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저술하여 미국과의 통상을 조선정부에 건의하였다. 이에 슈펠트는 한국과의 통상을 교섭해 달라고 이홍장을 만나러 북경으로 갔고 협상이 잘 이루어져 1882년 5월 22일 인천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의 이러한 성공을 '주의 깊게' 지켜본 브란트 공사는 곧 행동을 개시하여 이홍장과 수펠트를 만나기 위하여 텐진(天津)으로 갔다가 다시 인천으로 가서 1882년 6월 30일 한독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조인자는 조선 측은 조영하 외부대신이고 독일 측은 막스 폰 브란트 공사였다. 1882년은 한미, 한영, 한독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로 인해 민영익을 초대 주미대사로 파견하는 획기적인 해였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사무를 자문하기 위하여 독일인 법률가 묄렌도르프가 고종의 고문으로 부임한 것도 놀라운 진전이었다. 한영, 한독조약은 관세율 문제로 비준이 늦어지다가 몇 조항이 수정되어 1883년 11월 26일 다시 조인되었다. 14개조로 이루어진 이 수정 한독조약은 조선 측 전권대신 민영목과 독일 측 전권대사로 요꼬하마 총영사 자페(Eduard Zappe) 사이에서 서명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한독간의 우호관계유지, 최혜국 대우, 선박왕래 및 관세규정, 치외법권의 인정, 밀무역의 금지, 특권에 대한 균등한 참여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조약으로 주한 초대 독일 총영사로 젬부쉬가 취임한 것은 다음해인 1884년 10월 17일이었다.

독일어 교육은 1898년 9월에 덕어학교가 설립되고 일본으로부터 독일인 교사 볼얀을 초빙해서 이뤄졌다. 1908년 5월에 제1회 졸업생을 냈으나 3회에 걸쳐 1910년까지 5명밖에는 교육시키지 못했다. 한국인 교사로는 진수, 최태경, 유영이 있었다.


독일 한인이주와 정착과정

한독 관계는 1882년 수교를 한 이래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 재독 한인사회의 역사는 이것과는 직접적인 연관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1960년대 이후 이주자들 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온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 여세로 인한 동남아시아 확산을 두려워했던 미정부는 한국정부에 보이지 않는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미정부는 대외적으로 한국 쿠데타 정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그 동안 지급해왔던 경제원조를 중단하는 등의 강력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한 미국의 강력 조치에 암담해진 혁명정부는 미국을 제외한 나라에서 차관을 구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구원의 손길이 닿은 곳이 서독이었다. 경제 원조국이 구체적으로 서독으로 정해진 이후, 정부는 곧 실행정책으로 백영훈 박사를 중심으로 한 경제협상 사절단을 파견해 서독정부와 3차에 걸친 협상을 해나갔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차관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보증이 있어야만 했다. 그것도 제3국 은행의 지급보증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경제정치상황을 미루어 봤을 때 어떤 제 3국의 은행도 보증을 서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서독정부 역시 당시의 차관유치에 관한 법령을 무시하면서까지 한국을 도울 어떤 정치적 이유도 없었다. 돈을 빌릴 어떤 명분도 지급보증의 가능성도 없는 상황에서 고안해 낸 것이 한국의 노동력 활용방안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백영훈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62년 겨울, 5천명의 석탄광부와 2천 명의 간호사들이 서독에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당시 서독에 파견되는 5천 명의 광부모집에 무려 4만 5천명이나 응시했으니 얼마나 일자리가 없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 광부 5천 명과 간호사 2천명을 서독에 파견하는 데는 사연이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서독정부의 상업차관을 얻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차원의 힘든 노력 끝에 서독정부로부터 1억 5천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내 인가를 받았으나, 어떤 외국은행으로부터도 지급보증을 받을 길이 없었다.

이때 착안된 발상이 우리의 노동력을 서독에 파견하는 일이었다. 서독은 패전 후 산업을 재건하는 데 광부와 간호사들이 부족한 실정이었고 외국 근로자들의 도움이 절실한 시기였다. 서독정부와 교섭을 통하여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3년 동안 서독에 파견근로를 하기로 협약을 맺었고 그들에게 지급되는 3년 동안 서독에 파견근로를 하기로 협약을 맺었고 그들에게 지급되는 3년간의 월급을 서독의 콤메르쯔 방크(Commerz Bank)에 예금한다는 조건으로 현지 은행에서 지급보증을 받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광산근로자와 간호사의 3년간의 노동력을 서독에 파견하였고 이들의 노임을 담보로 서독은행에서 지급보증을 맡도록 한다는 상업차관계약이 1961년 8월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된 것은 서독 협상 팀의 유동적인 협상태도가 한 몫을 했고, 백영훈 박사를 비롯한 한국 측 협상팀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협상 결과 정부는 발 빠르게 상업차관계약을 위해 노동력의 응시자 모집(광부 5천 명 모집에 응시자 4만명, 간호사 2천명 모집에 2만여명이 지원)을 시작하였고, 결국 이 때 선발된 사람들 - 광부 5천명과 간호사 2천명이 선발 - 이독일 이민 1세대가 되었다.

1962년이 한인이 독일 땅에 첫발을 내딛는 해였다. 독일 교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광부의 경우, 한국정부(노동청)와 독일 석탄광산협회(탄광협회)가 1963년 12월 16일 체결한 󰡐한국 광부 독일광산 임시취업계획 협정󰡑 에 따라 3년의 계약기간 동안 광업소의 지하 작업에 종사하기 위하여 독일로 갔다.

광부의 경우와는 달리 간호사는 초기(1963-1969)에는 정부간의 협정이 아니라 재독 한국인 의사인 이수길 박사와 이종수 박사의 주선으로 파독되었다. 정부(주독 대사관 노무관)는 1969년 9월 22일에 '한국 간호요원 독일내 병원 취업에 관한 절차'를 독일 병원협회와 합의했으며 다음 해인 1970년 6월 26일에는 '유자격 한국 간호원 및 간호보조원 독일 병원 취업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독일에는 광산 근로자, 간호사 외에 각종 기술자가 장기 또는 단기 훈련을 받기 위하여 왔다. 북부의 항구지방에는 조선과 관련된 기술자가 왔으며 용접공, 전기공, 전자기계전문가, 철강 기술자, 기계공, 그리고 병아리 감별사도 훈련을 받았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독일에 잔류하여 교민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독일에는 프랑스나 영국 못지않은 많은 유학생이 있었지만 이들 중 독일에 잔류하여 교민사회를 이룬 사람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단지 현 유학생의 수가 급증하여 독일 한인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을 뿐이다. 유학생 수가 1978년에는 712명에 불과하였으나 1988년엔 3,492명으로 10년 사이에 5배로 증가하였으며, 현재는 그 수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이다. 재독 한인 언론들은 2001년 유학생의 수를 최소 약 5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을 뿐이다.


독일 한인사회의 성장기반과 특성

독일의 한인 동포가 광산근로자와 간호사 출신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독일 한인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정착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이미 귀국한 사람들도 있고 특히 광산근로자의 경우 3년 계약기간이 끝난 후 다른 직종으로 전환하여 다른 지역으로 떠난 사람들도 많았지만 간호사외 기술자들은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주로 분포하고 있었고, 광산근로자들은 북서부 루르 공업지대와 중부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남부 뮌헨에 주로 분포하고 있었다. 독일로 이주한 한국의 광산근로자는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노동청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조건은 35세 미만으로 병역을 필한 자들로 노동청에서 신체검사와 적성검사뿐만 아니라 일반 상식과 영어시험을 봐서 합격한 사람만 독일로 올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광부로 일했던 사람들보다는 주로 광산에는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많이 지망하였으며 이들 중에는 고학력자들이 많았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광부의 30%가 대학졸업자였다.

이들이 20Kg이 넘는 착암기를 들고 경사진 막장에서 하루 3교대로 직접 채탄작업을 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또 한국 광산근로자들은 광산에서 소수민족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아 상대적으로 많은 차별을 받았다. 당시에 터키인들과는 달리 한국인 광산근로자들은 노동조합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위험한 사업장에 투입되고는 하였다. 독일인 사업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한국인은 체력이 약해 광산 근무에 적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광산업을 평생하기에는 학력수준이 너무 높았으며 그로 인해 병가를 얻어 유럽 여행이나 다니는 불성실한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간호사들로 인해 많이 해소되었다. 그리고 광부들도 다른 직종으로 옮긴 후에는 다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서독과의 경제협상을 할 시기, 카톨릭 교회에서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들의 매스컴 보도가 협상 관계자들 및 회자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1960년대 당시의 서독은 2차대전 패전의 상처를 딛고 급성장하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광산근로자나 병원 노동력인 간호사 같은 고된 일에는 외국에서 노동력을 사오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 천사..... 인간으로 어려운 헌신적 봉사정신에 놀라울 뿐.....'이라는 기사는 독일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기에 충분하였다.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들은 초기에는 이종수 박사가 독일 병원과 계약을 체결하여 개인 초청 형식을 독일에 왔었지만, 그 후 이것이 공식화되어 1969년에는 한국의 해외개발공사와 독일 병원협회의 계약체결로 많은 수의 한국 간호사들이 유입되었다. 1977년까지 독일에 간 총 간호사 수는 1만명을 넘었으며 1980년대의 조사에도 약 5천명 정도가 독일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간호사들도 광부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언어 장애 등의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1년 정도가 지나면 거의 모든 문제들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병원생활에 익숙해지자 병원 당국과의 문제도 없어졌으며 특히 노인을 비롯한 환자들을 정성껏 돌봐 한국 간호사들의 인기가 높았다. 한국 간호사들은 주사도 아프지 않게 놓는다는 소문이 금방 퍼지기도 했다. 이들은 성실할 뿐만 아니라 인간미도 있고 덕성이 있어 직장동료로도 모범적인 사람들이었다. 간호사들은 광부들보다 언어도 빨리 습득하여 수간호사가 된 경우도 많았으며 20%정도는 진학하여 계속 공부하였고,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로 전업한 경우도 많았다(최소 16명).

한달 보수 400마르크에서 700마르크를 받던 한국인 노동자들은 시간 외 근무를 자청하여 봉급의 12%를 세금, 국민 연금, 질병보험, 실업자보험 등을 공제한 뒤 지하 근무 광부가 2천 마르크, 지상 근무자는 1천 7백 마르크에 달하였으며, 간호사들은 1천 5백 마르크 정도를 받았다. 이들은 틈틈이 독일어 공부, 첨단기기 관련 기숙 익히기, 수공업 분야 기술 익히기에 여가시간 전부를 투자하였다. "열심히 일하자. 그래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보자󰡒 라는 것이 독일 땅에 간 한국인 노동자들의 정신적 모토였다.


독일한인사회의 현 상황

2001년 독일 땅에는 광부 출신 6천 명과 간호사 출신 1만 2천명, 총 1만 8천 명의 이민 1세대와 1만 7천 명 정도의 2, 3세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인 광산 근로자의 약 40%가 미혼이었다. 이들은 계약기간 3년을 지내고 한국으로 귀국한 사람도 있었으며, 간호사들과 결혼하거나 간혹 독일 여자와 결혼하여 독일에 남아 다른 직종으로 옮긴이들도 있었다. 독일에 온 광산 근로자 중 40%는 3년 계약 근무 후 다시 귀국하였으며, 20%는 미국과 캐나다 등 주로 북미권으로 다시 이주하였다. 나머지 40%가 독일에 체류하였다. 독일에 체류하게 된 대부분의 광부들은 주로 부인의 체류권에 의존해 체류연장을 받으며 다른 직종으로 노동허가를 얻어 독일에 거주하였다.

재독 한인동포들의 주거, 식생활 소득수준, 자녀문제 등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통계를 바탕으로 한 서술은 아직까지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의 관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재독한인 사회의 주 구성원은 광산근로자와 간호인력 출신 한인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는 것은 전체 한인 동포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산근로자 중 독일에 잔류한 한인들은 거의 간호인력 출신 한인들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이에 반해, 간호인력 출신들은 광산근로자, 유학생, 상사직원뿐만 아니라 독일인 등 다양한 배우자를 선택하였다. 이중 가장 많은 형태는 광산근로자 출신 남자와 간호인력 출신 여자와의 결합이다. 배우자 선택의 유형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한인 가정은 부부 모두가 직장에 다니는, 이른바 맞벌이를 하고 있다.

재독한인들의 식생활은 매우 보수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식사에 관해서는 오히려 한국적인 것을 철저히 지키는 편이다. 아침식사의 경우 자녀의 성장에 따라 독일식으로 간단히 먹는 경우가 많지만, 저녁식사는 퇴근한 주부가 장만한 밥, 국, 고기, 김치 등의 전통적인 식사를 한다. 개인주택을 가진 한인들은 텃밭에 야채를 재배하는 경우가 많고, 각종 한인 모임이나 교회, 한글학교에 한인 야채상이 배달을 오기도 한다. 대도시의 경우 한국식품점 또는 아시아 식품점이 많이 있으며 통상한인들은 주1회 정도 한국식품점에 가사 장을 본다.

독일에서 출생한 한국인 2세들은 오늘날 대학에 진학하거나 졸업할 나이에 이르렀다. 독일에서는 자녀수당과 세금혜택 등으로 자녀출산을 장려하고 있지는 하지만, 한인들도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생활 여건상 많은 자녀를 둘 수 없고 한 명 내지 두 명의 자녀를 두는 것이 보통이다. 또 결혼을 한 1.5세 와 2세가 이미 많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부모를 모시고 동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인동포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한글학교와 교회 등에서의 종교활동이다. 가톨릭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한국보다는 가톨릭 신자비율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988년 집계에 따르면 전 독일에 21개의 한인 가톨릭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특히 1970년 이후에 많이 생겼고 아헨 지역을 비롯한 서부지역에 가장 많다.

재독 한인의 신교 교회도 대체로 1970년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다. 독일 신교교회연합과 한국기독교 연합사이에 협정을 맺어 1972년 한국에서 목사 5명을 독일에 파견하였다. 5명의 목사는 베를린, 함부르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프랑크푸르트와 슈트트가르트에 배정되었다. 이후 각 교파가 독일에 한인교회를 세우게 되었는데 그 과정은 유학 온 신학생이 교회를 세우는 경우, 교단에서 개척한 경우, 재독 한인이 교회를 세우고 한국에서 목사를 초빙한 경우 등 매우 다양하다. 현재 교회의 수는 92개에 이른다. 이 중 18개는 프랑크푸르트와 그 인근 지역에 그리고 16개는 베를린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인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고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에는 24개에 달하는 교회가 있다. 교회는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교민과 유학생이 만나는 장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교인들의 전체적인 신앙생활 양태는 한국의 경우보다는 더 진지하다고 볼 수 있다.

재독한인들이 겪는 사회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이중국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독일의 한인들은 한국이 어려웠던 시기에 조국을 떠나 어두운 땅 속에서 가난에 대항하는 의지를 다졌기 때문에 남다른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한국 국적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심리적 문제에 머무를 수가 있다. 하지만 2세들의 경우는 문제가 달라진다.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 국적법에 따라 2세들은 16세가 되면 한국과 독일 국적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이들이 한국 국적을 유지한다면 한국에 가서 1년 이상 취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병역의무를 지게 되고, 또 독일로 돌아올 때도 영주권을 다시 신청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중국적 문제는 특히 2세들을 위하여 외교적으로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사항이다.


- 이병렬 / 우석대 교수·행정학
- 월간 <열린전북> 2004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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