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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건강이야기]"건강은 스스로 돌봐야"

공은숙( 1) 2004.05.04 11:18 추천:4

해마다 추석이 다가올 때면 나는 암으로 투병하시다 돌아가신 둘째 시숙님이 생각난다. 돌아가시던 해 추석날 우리가족은 차례를 마치고, 시숙님이 입원해 계신 병원을 찾아갔었다. 암센터에는 명절이지만 치료를 받느라 병실마다 환자들이 누워있고, 간혹 가족들이 병문안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침울한 얼굴들로 인해 병동의 분위기 또한 표현할 수 없는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졌었다.


몰골이 앙상해진 시숙

오랜동안 뵙지 못해서인지 그간 시숙님의 모습은 너무도 변해있었다. 헐렁한 환자 옷 밖으로 나타난 수척해진 얼굴과 팔과 다리는 정말 피골이 상접한 상태여서 1년 전의 멋있었던 풍채나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검으틱틱하고, 꺼칠한 피부색은 암세포가 토해낸 독성으로 물든 듯하고, 멋있게 보였음직한 수염도 척박한 땅의 무성한 잡초처럼 보였다.

차마 아무말도 할 수가 없어 가만히 시숙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두 눈망울만 마지막 생명의 끝자락을 더듬고 있는 듯 보였다. 할말이 많을 것 같았다. 웬지 답답함을 가득 안은 듯한 시선을 지켜보면서 나 또한 똑같은 심정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그 우람하고 건강하던 풍채는 도대체 어디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 말인가? 그 날카롭게 번뜩이던 재치와 입담과 통쾌한 웃음은 모두 어디로 숨었단 말인가? 생생하게 팔팔거리던 젊은 혈기와 학문에의 열정은 그 무엇이 꿀꺽 삼켜버렸단 말인가? 누구를 원망해야 한단 말인가?


“건강을 돌보며 살아라”

시숙님은 우리에게 인생은 이런 것이라고 나름대로 느낀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어하신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다시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시숙님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희미하게 반짝이며 움푹 패인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자 나는 그만 용기를 잃어버렸다. 나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묻고 싶은 것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 순간 나는 입술에 크레이지 글루를 발라 놓은 것처럼 입을 조금도 벌릴 수가 없었다. 두발은 시멘트 바닥에 못박은 듯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내 온몸이 냉동된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우리에게 “건강을 잘 돌보면서 일해라”는 시숙님의 마지막 음성을 들었다. 우리는 아무런 말없이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시숙님의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남편이 통곡을 하며 슬피 우는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40대 중반의 꿈과 포부가 가득 찼던 한 남성의 인생은 이렇게 끝이 났었다. 참으로 허탈한 경험이었다. 그 후 나는 가끔 시숙님의 마지막 말을 천천히 되새겨 보곤 한다. “건강을 잘 돌보며 일해라”. 이 말은 일상에서 자주 듣는 너무도 흔한 말이다. 그냥 별다른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서로 부담 없이 한마디 던질 수 있는 그런 말이어서 전혀 인상적이지도 않고, 귀담아 들은 적도 별로 없었던 말이다.

그런데 그 평범한 말이 요즈음은 시시때때로 진리의 말이 되어 나의 가슴에 파고드는 것을 느낀다. 시숙님은 적어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건강을 잘 돌보는 것임을 얘기하고자 하신 것이 아닐까? 인생은 대단한 것처럼 다가오지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고 매일 성실하게 건강을 돌보며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당신이 건강을 돌보지 못함을 투병기간 내내 후회하신 것은 아닐까? 술을 과도하게 마시지 말 것을.. 운동을 조금씩이라도 할 것을.. 음식을 절제할 것을.. 마음을 편히 갖고 살 것을.. 지나친 욕심을 줄일 것을.. 등등.


뒤늦은 후회보다 자기돌봄으로 건강을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그 동안 내 몸을 돌보지 않았어요”이다. 자신의 몸을 잘 돌보았어야 하는데 돌보지 않아 병이 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아 병으로 고생하고 있거나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당사자나 지켜보는 사람 모두가 답답하고 힘이 든다.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잘 돌보는 것을 간호학에서는 자기돌봄, 혹은 자가간호(self-care)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고혈압이나 관절염, 당뇨병, 심장병, 암등 각종 만성질병은 오랜기간을 통해 자기돌봄이 결핍되어 온 결과이다. 매일매일 자기돌봄을 잘 실천하면 예방이 가능한 병들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자기돌봄을 위한 건강교육이 학교, 보건소, 보건지소, 보건진료소, 병원, 복지관, 경로당 등 다양한 기관들을 통해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고, 차츰 자기돌봄에 대한 개개인의 관심이 고조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없다거나 일이 많다거나 돈이 없다는 주위의 여건을 핑계로 둘러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아직도 건강에 대한 지식만을 축적하는데 그치고 실천을 하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자기돌봄을 잘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성이 필요하다. 즉,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 몸은 때로는 느낌으로, 때로는 통증으로,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조금 무겁게 등의 신호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몸 구석구석의 상태를 전해준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어떻게 섭취하는가에 따라, 매일 수면을 어떻게 취하는지에 따라, 매일 활동이나 운동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매일 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리고 매일 직장일이나 사회에서의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 소리는 달라진다. 그 소리를 무시하느냐 안하느냐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자기돌봄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자기돌봄은 더욱 중요해진다. 먼저 자기돌봄을 위해 가지고 있는 병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또한 병을 관리하는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병을 꿋꿋이 관리하고, 건강을 지켜나가는 인내가 요구된다. 자기돌봄이 잘 안되면 의료전문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 비용이나 고통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터이다.

자기돌봄은 누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자기의 몸을 돌보는 것이다. 자신의 구석구석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감과 힘을 스스로 얻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시숙님은 자기돌봄의 힘을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시지 않았을까?


탓닉한의 명상도 유용해

얼마전에 읽은 탁낫한이 쓴 “힘” 이라는 책에 소개된 명상법이 떠오른다. 미소명상, 세수명상, 운정명상, 컴퓨터 명상, 소리명상, 차명상, 걷기명상, 먹기명상, 시계명상, 화장실 명상, 온전한 휴식을 위한 명상, 포옹명상, 숨쉬기 명상 등. 매일 부담감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자기돌봄의 기술로서 참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는 미소명상과 숨쉬기 명상 2가지를 적어보고자 한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하루를 새로 맞이하는 경이로운 시간이다. 그 순간을 미소로 반겨라. 그리고 15분간 깨어있는 호흡으로 몸을 깨우라. 잠들기 전에는 자리에 누워 15분정도 명상을 하라. 호흡에 마을을 싣고 끝까지 호흡을 따라가라.

1. 미소명상 : 아침에 눈뜨며 나는 웃음 짓네, 새롭고 신선한 24시간이 내게 있네, 나는 기원하네, 매 순간을 충실히 살며, 모든 존재를 자비의 눈으로 바라볼 것을!
2. 숨쉬기 명상 : 들이쉬고 내쉬고, 깊이 천천히, 고요히 편안히, 웃고, 놓아버린다. 지금 이순간, 아름다운 이순간.


잠깐동안의 간단한 명상을 통해 혈압이 떨어지고, 통증이 사라지고,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는 심신이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매일 실천을 통해 건강을 지키고, 자기돌봄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은 어떨까?

계속되는 불경기로 사회의 구석구석에서는 고통의 신음이 쌓여가고 있다. 그리고 자살자의 수는 날로 증가되고 있다. 자기돌봄의 결핍이 가족과 사회의 병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기돌봄의 실천이 더욱 중요한 때이다. 자기돌봄을 가족돌봄의 실천으로 확대하는 기지를 발휘해 보는 것은 어떨까?


- 공은숙 / 예수간호대 노인간호학 교수
- 월간<열린전북> 2003년 10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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