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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영화이야기]올드보이(2)

유제호( 1) 2004.04.25 15:31 추천:2

문학작품을 포함한 대부분의 예술작품에 있어 일정의 ‘의사-진실성’이 요구된다. 이것을 쉽게 풀어쓰자면 ‘있을법함’, ‘그럴싸함’, ‘사실임직함’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이와 관련하여 국문학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수용하는 연장선상에서 언제부턴가 ‘핍진성’(逼眞性,)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핍진성’((逼眞性)이라는 용어는 왠지 우리 세대도 쉽게 친숙해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특히 신세대들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어려운 용어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되도록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 ‘그럴싸함’이라는 좀더 쉬운 말을 채택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영화와 그럴싸함의 미학

지금 거론하고 있는 ‘그럴싸함’은 과학과 논리 수준의 ‘진리’(또는 ‘진실’)와는 전혀 다르다. 아니, 그런 류의 ‘진리’와는 양립 불가능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오히려 대립되는 성격의 것이다. 사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과학과 논리 수준의 ‘진리’에 바탕하여 그런 류의 ‘진리’를 구현하는 활동이 아니라, ‘그럴싸함’의 미학을 기저로 역시 ‘그럴싸한’ 결과물들을 창조해 내는, 어찌보면 과학과 논리에 견주어 한 단계 더 ‘높은’--또는 더 ‘낮은’--수준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제 아래 다시 말하지만, 문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예술활동에 있어 일정의 ‘그럴싸함’이 요구된다. 언어예술인 시와 소설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내가 볼 때는 심지어 회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정물화나 인물화뿐만 아니라 여러 등급의 추상화마저도 그 나름의 ‘그럴싸함’이 결여된 경우 관객과의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예 ‘회화’로 공인받지 못하는 결과를 자초하게 된다. 순수음악과 관련해서는 논의의 전개가 훨씬 더 미묘하기는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점에 있어 대중가요는 물론 순수음악도 아마 예외가 아닐 것 같다.

한편 대중예술로 분류되는 영화에 있어서는 관객을 고려한 수용미학상의 ‘그럴싸함’이 훨씬 더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렇다면 일단 영화를 중심에 놓고 볼 때 과연 무엇(들)이 ‘그럴싸함’의 준거가 되는 것일까?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대답을 간략하게 미리 제시하자면 아래와 같다.

①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우리 각자가 항시적인 상호작용의 양상 아래 일상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현실이다. 요컨대 개별 영화작품 속의 인물, 장면, 사건, 크고작은 이야기들이 이런 ‘현실’에 비추어 ‘그럴싸해야’ 한다.
② 둘째는 유사 예술 부문들(특히 ‘영화’)에 있어서의 전통과 규칙, 그리고 거기에서 다루어진 기존의 각종 텍스트들에 비추어 영화속의 사건들과 크고작은 이야기들이 ‘그럴싸해야’ 한다. 요컨대 개별 영화작품 속의 모든 것이 이미 확립되어 있는 영화라는 ‘장르’를 준거로 관객들에게 ‘그럴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③ 셋째는 개별 영화작품 안에서의 ‘내재적인’ ‘그럴싸함’이 요청된다. 이런 요청은 쉽게 말해 개별작품에 있어 내적인 일관성의 문제에 속한다. 특정 영화가 제아무리 독창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그 전체적 짜임새에 있어서는 각종 파격과 비약이 ‘그럴싸하게’ 봉합되는 일정의 통일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현실에 준거한 그럴싸함

이런 예비 사항들을 바탕에 깔고 이제 영화 [올드보이]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보기로 하자. 우선 ‘현실’에 준거한 ‘그럴싸함’을 두고 볼 때 [올드보이]에는 ‘그럴싸한’ 측면이 훨씬 더 많다.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대개는 우리와 동류의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싼 동류의 환경에서, 우리가 하는 것과 동류의 행태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올드보이]가 ‘현실’에 비추어 아주 ‘그럴싸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영화 [올드보이]가 ‘현실’에 비추어 전적으로--또는 아주 높은 등급으로-- 과연 ‘그럴싸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느 점에서 ‘그럴싸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만취 상태의 오대수(최민식)가 지하철 객차 안에서 오줌을 누려고 하는 것은(아예 오줌을 누었던가?...) 그렇다 치고, 그가 파출소에서 풀려나면서 경찰들을 향해 (겁대가리 없이) ‘엿먹어라!’를 먹이는 것은 ‘현실’에 비추어 과연 ‘그럴싸한가?’ 또 다른 예를 들어, ‘사설감옥’의 존재는 과연 그럴싸하고, 사설감옥에서 풀려난 뒤의 폭력 장면들에서 오대수의 ‘일당백’의 괴력은 과연 그럴싸한가?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이우진(유지태)의 펜트하우스는 과연 그럴싸하고, 이우진의 최면 계략에 의해 이루어지는 오대수의 일식집 방문, 미도와의 만남, 오대수의 졸도, 뒤이어 싹트는 미도의 연정은 과연 그럴싸한가? 고등학교 시절 이우진과 그의 누나 간의 근친상간, 오대수의 발설, 누나의 상상 임신과 자살은 과연 그럴싸한가? 고등학교 행정실에서 사환의 배려로 이루어지는 오대수와 미도의 학적부 열람, 학적부 안에서 나오는 미장원 광고지, 거기에 씌어 있는 이우진의 확인 메시지, 복수를 달성한 이우진의 권총 자살, 스스로 가위로 혀를 자르는 오대수의 자해 등, 이 모든 것이 ‘현실’에 비추어 과연 ‘그럴싸한가?’

아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는 영화 [올드보이]가 이렇게 아주(또는 상당 정도) ‘이례적인’ 사태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극단적인 예가 바로, 첫째는 쌍방향의 복수극의 전개는 물론 일부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마저 철두철미하게 이우진의 최면 계략에 좌우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작품 말미에서 심령술녀(?)의 배려 덕분에 다행히도(?) 오대수가 ‘선택적 기억상실’(또는 ‘자아의 양분과 선택적 소멸’)에 성공하게 된다는 점이다.


영화 장르상의 그럴싸함

이렇게 볼 때 [올드보이]에는 ‘현실’에 준거한 ‘그럴싸함’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고 일단 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현실’에 준거한 ‘그럴싸함’의 이같은 심각한 결여에도 불구하고, 영화 [올드보이]의 거의 모든 관객들이 위에서 언급한 ‘이례적인’ 사건들과 크고작은 이야기들을 무려(?) 2시간 안팎에 걸쳐 ‘그럴싸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왔으니 말이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 두 번째 유형의 ‘그럴싸함’, 즉 ‘장르’상의 ‘그럴싸함’을 고려해야 한다. 사실 영화는 ‘현실’을 ‘현실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모든 예술 부문에 있어 ‘장르’상의 ‘그럴싸함’이 있고, 영화에는 영화 ‘나름’의 또 다른 ‘그럴싸함’이 있다. 그리고 이 ‘장르’상의 ‘그럴싸함’은 ‘현실’에 견주어 그 외연이 훨씬 더 넓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개별작품에 따라 그 외연이 거의 무한하게 확대될 수 있다.

그런데 관객들 또한 영화의 이런 속성을 알고 있다. 아니, 얼마간의 개인차 아래 거기에 이미 친숙해져 있거나 훈련되어 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사실 대부분의 관객들이 유사 부문의 예술작품들(특히 다른 영화들)을 통해서 [올드보이]에 있어서보다 훨씬 더 기상천외의 것들, 심지어는 전적으로 신화 또는 과학공상에 속하는 것들마저 ‘그럴싸한’ 것으로 수용한 경험을 이미 지니고 있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영화관에 들어서는 관객들은 ‘어지간하면’ ‘그럴싸한’ 것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이미 되어 있는 셈이다.

나아가서 영화관 안의 관객들은 지금 자기들이 시장에서 장을 보거나 유세장에서 연설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을 시시각각 자각하게 된다. 물론 개별작품에 따라 특유의 ‘그럴싸함’이나 아주 높은 등급의 ‘긴박감’ 때문에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몰입이 극대화될 수 있고, 이에 따라 현실과 영화 간의 ‘이격 상태’에 대한 관객들의 자각이 극소화될 수 있으며, 역시 개별작품에 따라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모든 영화가 적어도 2시간 안팎에 걸쳐 관객들을 ‘붙잡아’ 두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관객들을 상대로 상당 수준의 ‘그럴싸함’이 작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 내재적인 그럴싸함

그렇다면 영화 [올드보이]는 ‘총체적’인 ‘그럴싸함’에 있어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가? 바꾸어 말해서, 위에서 언급한 [올드보이] 안의 ‘이례적인’ 인물들, 사건들, 그리고 크고작은 이야기들이 영화라는 ‘장르’상의 또 다른 ‘그럴싸함’으로 충분히 해소되었는가? 내가 볼 때는 ‘아니다.’

사실 영화 [올드보이]에는 관객들을 고려한 수용미학상의 ‘총체적’인 ‘그럴싸함’에 있어 상당한 취약점이 있다. 왜냐하면 비록 ‘현실’에 준거한 ‘그럴싸함’의 심각한 결여가 ‘장르’상의 ‘그럴싸함’에 의해 상쇄된다고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세 번째 유형의 ‘그럴싸함’, 즉 ‘내재적’인 ‘그럴싸함’에는 어딘까 ‘찜찜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올드보이’의 전체적인 구도는 시간상으로 볼 때 ① 지극히 진부한 성격의 일상적인 장면들(전반부 약 4-5분), ② 철두철미하게 이우진의 최면 계략에 좌우되는 장면들과 거기에 부수적인 장면들(중반부 전체), ③ 설원의 신화적 장면(후반부 약 2-3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올드보이’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작용하는 이우진의 최면 계략이라는 점에서 장면①은 장면②에 용해될 수 있고, 그에 따라 작품 ‘내재적’인 ‘그럴싸함’을 부여받을 수 있다.

문제는 장면③이다. 이우진이 권총 자살하는 펜트하우스 장면에 이어 뜬금 없이 나타나는--그래서 관객들에게 강요되는--이 설원의 장면은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내재적’인 ‘그럴싸함’이 결여된 일종의 ‘사족’으로 여겨진다. 오대수를 중심으로 하는 공간 설정만 두고 보더라도 그렇다. 장면①,②는 돈으로 아무것이나 할 수 있는 이우진의 펜트하우스를 제외하고는, 지하철 객차, 파출소, 공중전화 박스, 허름한 사설감옥, 일식집(스시바), 허름한 원룸, 중국집, 고등학교 운동장, 미장원 등, 모든 것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일상적인 공간들이다. 그런데 장면③은--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뉴질랜드 전지 촬영을 했다고 할 정도로--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설원이다. 이렇게 공간 배치만 두고 보더라도 장면③이 ‘내재적’인 ‘그럴싸함’의 수준을 현저히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장면①,②의 각종 ‘이례적인’ 사건들과 크고작은 이야기들이 이우진의 최면 계략(일종의 ‘운명’)이라는 큰 줄기의 내적 일관성을 근거로 ‘내재적’인 ‘그럴싸함’을 부여받는다고 할지라도, 이우진의 권총 자살을 기점으로 해서는 그것 또한 그 ‘이례적’인 효력을 상실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영화 ‘올드보이’의 대단원(즉 장면③)은 이런 단절과 더불어 ‘현실’ 쪽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화’ 쪽으로 멀찌감치 달아나 버린다. 그래서 뜬금 없이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설원, 거기에서 뜬금 없이 마주하고 있는 오대수와 심령술녀(?), 그리고 거기에 역시 뜬금 없이 나타나는 미도, 미도의 포옹과 사랑의 고백, 그리고 영화 [25시]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키는 오대수(최민식)의 이상야릇한 표정 연기..., 이렇게 그야말로 관객의 의표를 찌르며 영화 [올드보이]가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작위적인 해피엔딩과 메시지의 과잉

[올드보이]의 감독이 왜 이렇게 ‘그럴싸함’의 미학을 스스로 거스르게 되었을까? 대단원에 이르러 ‘내재적’인 ‘그럴싸함’을 이토록 심각하게 스스로 손상시키는 가운데, 감독이 그 반대 급부로 얻고자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가 볼 때 그것은 관객들을 상대로 하는 감독 자신의 메시지의 상대적 투명성이었다. 더군다나 시나리오상의 대단원을 수 십 번에 걸쳐 이리저리 바꾸었다는 후일담에 비추어 보면 감독 스스로 많은 고심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올드보이]의 감독이 보도자료에서 말하기를 “과잉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좋다. 다 좋다. ‘어디 한 번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식으로, 현실에 준거한 폭력과 금기 위반의 ‘과잉’을 겨냥한 것도 좋고, ‘어디 한 번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 식으로, 영화라는 장르에 준거한 파격과 비약의 ‘과잉’을 겨냥한 것도 좋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이것만은 아니다. 제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장면③은 관객들을 상대로 하는 ‘메시지’의 ‘과잉’과 더불어 총체적인 ‘그럴싸함’의 미학에서 벗어나 있다.

사실 ‘그럴싸함’의 원칙은 문학을 포함한 예술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생활에도 짙게 배어 있다. 문학과 예술처럼 우리의 실생활도 과학과 논리 수준의 ‘진리’를 바탕으로 그런 ‘진리’를 구현하는 활동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럴싸한’ 유형무형의 이데올로기 환경에서 ‘그럴싸하게’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우리와는 무관하게 확립된 ‘근거 박약한’(그저 ‘그럴싸할’ 뿐인) 각양각색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보편적인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과 행태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스스로 근거 박약한 각종 금기로 자기를 통제하고 타인을 감시하는 가운데 그같은 이데올로기 환경의 확대재생산에 가담하고 있다. [올드보이]의 감독은 바로 이런 현실을 우리에게 각종 ‘과잉’ 수단으로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하면 우리 모두 그런 현실을 알고 있다. 제아무리 기상천외의 이례적인 것도 수용하는 사람(또는 태도)에 따라서는 ‘그럴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 그런 ‘똘레랑스’가 필요하다는 것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이모저모 고민하는 가운데 ‘그럴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올드보이]의 감독은 마치 그것을 혼자 알고 있고 혼자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이우진의 권총 자살 이후를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놓지 않은 것도 내가 볼 때는 관객들에 대한 감독의 이런 불신에 기인한다.

요컨대 [올드보이]가 택한 지극히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해피엔딩’, 그것은 곧 (모르는 상태에서 성립된 부녀 간의) 근친상간을 기어코 유지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달리 말하자면, 이우진의 권총 자살 이후 관객들이 ‘딴 길로 새는 것’을 막기 위한 감독의 ‘과잉’ 메시지였다--앞의 글에서 다룬 주요 대사들의 ‘반복’도 일정 부분에 있어 메시지의 ‘과잉’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다른 류의 ‘과잉’이 작품 내재적으로 무난하게 해소되는 반면에 이같은 메시지의 ‘과잉’은 아무래도 영화 [올드보이]의 ‘옥에 티’로 여겨진다.


- 유제호 / 전북대교수·불문학
- <열린전북>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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