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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라톤일지]전군 마라톤 대회 참가기

고동호( 1) 2004.04.20 16:11 추천:7

2003년 4월 13일. 나의 첫 풀 코스 마라톤을 달리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 무려 4시간 51분 31초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한 마디로 사지에서 겨우 탈출한 느낌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몸이 괜찮았을 때의 상태는 거의 기억나지 않고 힘들다고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의 기억만 선명하다. 중간에 몇 번이고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하고 이 놈의 거리가 왜 이렇게 줄어들지 않느냐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창피해서 걷지 못하고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만 걸었는데, 나중에는 얼굴이 두꺼워져서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는 곳에서도 뻔뻔스럽게 걸었다.

아침 집에서 07:55에 출발했다. 은근히 늦게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는데 운동장에 가 보니까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다. 버스와 승용차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작년에는 일찍 가서 여유 있게 주차를 했나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허둥지둥하면서 차분하게 준비를 하지 못했다. 짐 맡기는 곳에서 학과의 두 분 강사 선생님을 만나서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집사람과 선전을 다짐한 후에 헤어져 혼자 운동장에 들어갔다. 몇 백 명이 트랙을 돌면서 몸을 풀고 있었고, 그보다 몇 배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혼자 쓸쓸하게 몸을 풀면서 기다렸다. 그리고 처음에 오버 페이스를 하지 않기 위해서 출발 대열의 맨 뒤쪽에 갔다.


마라톤의 시작

0~5km(30:24).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지방에서 오신 분들이 벚꽃이 아름답게 피었다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린다. 속으로 계속 ‘천천히, 천천히’를 다짐하면서 달렸는데, 5km를 지나면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시계를 보니 적당한 페이스라고 느꼈다.

5~10km(28:11). 계속해서 같은 페이스로 가자고 다짐하면서 달린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은 심심하다. 아예 혼자 있을 때는 외롭고 심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뛰는데 혼자만 아무 말 없이 달리자니 마음이 좀 그랬다. 10km를 지나면서 시계를 봤더니 약간 빨라졌다. 오버 페이스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1분 30초 정도 빠르다. 7km쯤 갔는데 하프 코스의 선두 행렬이 지나가기 시작한다.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내가 100m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속도하고 비슷한 것 같다. 하기는 내가 언제 100m 거리를 전력으로 질주했던가? 한 20년쯤 된 것 같다. 역시 물 한 모금 마시고 통과.

10~15km(30:10). 여자부 하프 선두가 지나가는데 옆에서 뛰던 아주머니가 말을 붙여 왔다. 저 선수는 풀 코스는 절대 안 뛰고 하프만 달린다고... 달리면 꼭 우승한다고... 자기는 풀 코스가 두 번째라고 한다. 지난 번 동아마라톤 때 4시간29분에 머리를 올렸다고 한다. 고향은 익산이고 등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10여 분 이상 달렸다. 그런데 달리다가 보니 오른쪽에 할아버지가 달리고 계신다. 속으로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배번을 봤더니 소속이 한글학회라고 되어 있었다. 한글학회에 마라톤을 하는 모임이 있었던가 하는 의아한 마음에 아주머니께 먼저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할아버지께 갔다. 사시는 곳과 연세를 여쭸더니 김제에 사시고 올해 70세라고 하신다. 또 여러 가지를 여쭈어서 한글학회 회원이기 때문에 한글학회 소속으로 적었고, 10월 9일에는 전주에서 서울까지 달릴 예정이라는 정보(?)를 들었다. 하여간 대단하신 분이다. 소속을 알려 드리고 언제 학교에 오시면 놀러 오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한글날 공휴일!”을 외치고 또 혼자 달리기 시작했다. 14km 지점에서 파워젤을 먹었다. 입안이 뻑뻑해서 급수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15~20km(28:06). 아직도 몸 상태는 괜찮다. 제발 이 상태가 계속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만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졌다. 어디서 봐야 하나? 어떤 남자들은 그냥 길가에서 돌아서서 실례를 하고 있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선수들은 그냥 실례하면서 달린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혼자 웃었다. 그런데 왜 주유소는 이렇게 나타나지 않을까? 앞에서 늘씬한 아저씨와 날씬한 여자분이 가볍게 달리고 있다. 소속은 다른 것 같은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아저씨가 달리는 폼은 발의 앞부분부터 지면에 닿아서 보통 알고 있는 상식과 다르다. 그렇지만 사뿐사뿐 달린다. 뱁새가 황새 걱정하는지 모르지만 저렇게 뛰면 오래 뛰지 못 하든가 무릎을 다친다고 하는데... 20km 지점이 가까워지자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무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보폭을 짧게 하고 올라갔다. 급수대에서 또 물 한 모금 마시고 통과했다.


다리가 풀려가며

20~25km(35:06). 그런데 주유소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길가 버스 정류장 뒤나 소로에서 실례를 하고자 해도 그런 곳마다 사람들이 있었다. 그냥 실례를 해 버릴까? 아니지. 지금까지 참았는데, 조금만 더 참자. 22km 정도 지나자 비로소 주유소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계속 따라왔던 두 분의 남녀를 보내고 주유소로 직행해서 그 동안 마신 액체를 대지에 시원하게 반납하고 다시 달리려고 했는데... 아뿔싸. 다리의 맥이 풀려 버렸다. 큰일났네. 갈 길은 왔던 길만큼 남아있다. 조금씩 속도를 올리려고 했지만, 발놀림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다음부터는 소변도 다리에 힘이 충분히 남아 있을 때 해결해야 하겠다. 길가에서 다리 스트레칭을 했는데, 조금 나아진 것 같다. 그렇지만 완전히 페이스 다운이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죽었다. 힘을 내기 위해 파워젤을 하나 더 먹고, 급수대에서 물 한 잔 마셨다.

25~30km(34:44). 물 한 잔 마시니 그래도 조금 나아진 것 같다. 그래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 힘을 내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27km쯤 되는 지점부터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 참. 군대에서 행군하면서도 잠을 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달리면서 졸음이 온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역시 며칠 잠을 자지 못한 후유증이 나타나는 것인가 보다. 머리로는 졸면 안된다, 졸면 무슨 사고가 날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눈꺼풀의 무게는 계속해서 눈동자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참자. 참아야 한다. 이제 조금 더 가면 마지막 고비인 오르막길이 나타날 텐데, 졸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다보니 길가에 누워서 스트레칭을 하고 계신 분들도 보였다. 나도 저렇게 한 번 해 볼까? 아니 누워서 10분 정도만 눈을 붙였다가 달리면 힘이 펄펄 나서 나머지 구간을 쉽게 달릴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야, 한 번 눕거나 앉으면 그걸로 끝이야. 걸어서도 안 돼. 끝까지 달려야 해. 이러한 감정과 이성의 싸움이 머리 속에서 계속되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우위에 있었다. 조금 있자 뒤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4시간30분 페이스 메이커 무리가 지나간다. 따라가려고 해 보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젠장 지금 이 시간에 저렇게 빨리 달리면 아무리 늦어도 4시간15분에는 들어가겠다. 아니 4시간30분 페이스 메이커면 4시간30분에서 앞뒤 5분 정도 편차를 두고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조금 지나자 또 4시간30분 페이스 메이커가 지나간다. 이번에는 속도가 조금 느리다. 어이구, 참으로 훌륭한 페이스 메이커다 하고 혼자 칭찬을 해 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 이 판국에 남 칭찬하고 남 비난할 일이 없었다. 그냥 졸지 말고 걷지 말고 달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30km 지점에서 다시 물을 마셨다.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다.

30~35km(40:54). 이제 조금만 가면 눈에 익은 지형이 나타날 것이고, 그러면 조금 덜 힘이 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달린다. 조금 지나자 앞에 고속도로 진입로 근처의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아, 저기가 안내 지도에서 봤던 그 오르막길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저기에서는 절대로 걷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멀리서 봐도 벌써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보폭을 줄이고 열차가 산을 올라가듯 헉헉거리면서 올라갔다. 이제 저기만 올라가면 고생 끝이다. 그냥 쉽게 운동장까지 갈 수 있겠지 하면서 오르막 고개를 끝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약간의 내리막길에서 무릎이 조금 아파 왔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났다. 오늘 내가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다치면 작년처럼 또 몇 달 동안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래도 달려야지. 여기까지 한 번도 걷지 않았는데, 여기부터 걸으면 졸음을 참아가면서 달려온 것이 헛수고가 되는데... 그렇지만 어차피 1등, 2등을 다투는 달리기도 아니고, 완주만 하면 됐지 4시간30분이나 4시간59분이나 무슨 차이가 있어? 이렇게 감정과 이성이 머리 속에서 싸움을 하는 동안 그 싸움을 말리기 위해 마지막 남은 파워젤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달리다가 호남제일문을 지나서 우회전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성이 감정에게 항복해 버렸다. 보기에 엄청나게 긴 오르막길이 나타난 것이다. 어? 저런 길은 없었는데... 정말 안되겠다. 오늘 달리고 그만 달릴 것도 아니니까 무리하지 말자. 그래. 오늘은 이성이 감정에게 졌다. 그냥 다치지만 말고 걸어서라도 완주하자. 한 번 걷기 시작하니 다시 달릴 수가 없다. 한참을 걷다가 조금 달리기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800보 달리기, 800보 걷기 작전으로 바꿨다.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35km 지점에서도 물 한 잔 마셨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자원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다 왔다고 힘을 내라고 격려해 준다. 참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너무나 힘들어서 그들에게 변변히 손 한 번 들어주지 못해서 너무나 미안했다.


신천지를 달리며

35~40km(45:24). 이제부터는 내가 달려본 적이 없는 거리다. 기어서라도 들어가야지. 그런데 또 오르막이네. 전주 시내에 이렇게 오르막길이 많았던가? 차를 타고 다닐 때에는 이 길이 오르막길이라고 느끼지 못했는데...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군산은 해안 쪽이고 전주는 내륙 쪽이니 전체적으로 볼 때 계속해서 오르막이라는 것을. 이제 와서 깨달으면 뭐하나? 미리 알고 정신무장을 해 두었어야지. 그렇지만 가야 한다. 헉헉헉헉. 이제는 걷는 것조차 힘들다. 길가에서 사람들이 박수를 쳐줬지만 쳐다보지도 못 하고 뻔뻔스럽게 걸었다. 마라톤 풀 코스를 걷지 않고 끝까지 달린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 때였다. 경찰 차가 지나가면서 조금 있으면 교통 통제가 풀린다는 방송을 했다. 안 되지. 통제가 풀리고 신호등에 걸리면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 이것은 마지막으로 세웠던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지친 몸과 풀린 다리를 달래면서 조금씩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달리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 때문에 차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조금씩 달려야 한다. 그렇지만 트럭이 안내 간판을 치우면서 지나가는 등 파장 분위기가 역력했다. 조금 가니 40km 안내판이 나와서, 역시 물 한 잔 마셨다.

40~42.195km(18:28). 이제 운동장이 보이니 다 왔다. 거리에는 달리기를 마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시외버스나 고속버스 터미널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사람, 전주 역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사람도 전주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멈춰 서서 답변해 주지 못하는 나에게 짜증이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길가에 서서 응원해 주시는 분들 때문에 달리는 흉내는 내고 있지만 이미 평소에 걷는 속도보다도 더 느려졌다. 그래도 흉내라도 내야지. 그런데 왜 입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달리고 달려도 한없이 운동장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것 같다. 간신히 입구에 들어서니 몇 번 달려서 낯이 익은 운동장 트랙 풍경이 나타나서 조금은 나아졌다. 헉헉대면서 결승점을 통과하고 시계를 봤더니 4시간 51분 31초였다. 대장정이 비로소 끝난 것이다.

끝나고 완주자 출구를 따라가다 보니 물이 있었다. 그렇지만 완주한 사람만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북새통이었다. 정말 힘들어 죽겠는데 물도 마음대로 못 마시겠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간신히 물 한 모금 마시고 칩을 반납했다. 그 다음에 완주메달, 빵 한 개, 사과 한 개, 정체불명의 음료수 조금, 간단한 가방 하나를 받았다. 배고픈 마음에 일단 빵을 개봉하여 먹으면서 맡겨놓은 짐을 찾으러 갔다. 짐을 찾아서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집사람한테 전화가 와 있었다. 작년보다 10분 빨리 완주하고 집에 와서 샤워까지 했다고 한다. 목이 말라서 가게에서 물 한 병 사서 마신 다음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목욕탕에 가서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오가다가 집에 와서 체중을 달았더니 고교 시절 이후로 처음인 59.8kg이었다. 그리고 해야 할 일 처리하고 막걸리 한 병 마시고 저녁 8시에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평가:

(1) 훈련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출전했다. 보통은 연습기간 6개월 이상, 연습 거리 1,000여km 이상인 사람들이 풀 코스를 달리는데, 3개월 연습에 연습거리 600km로는 무리였다.

(2) 체계적인 훈련이 부족했다. 평소 훈련할 때 지나치게 평지에서만 연습했는데, 오르막길 연습을 충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스피드 훈련도 없었다.

(3) 마지막 몸 상태 조절에 실패했다. 여러 가지 일이 밀려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지만, 다음부터는 미리 준비해야 하겠다.


- 고동호 전북대 국문과 교수
- 월간 <열린전북> 1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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