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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승복 동갑나기 세대의 애환

최인( 1) 2004.04.18 07:09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 났다.' 우리는 위대했다.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운명였다. 이름하여, "국민교육헌장"

지금은 초등학교로 변한 그때 국민학교 시절, 날마다 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않으면 하루가 가지 않았다. 지금도 국민교육헌장의 첫머리는 그냥 나온다. 그러나, 정작 헌장을 외웠던 나 자신은 장대한 사명, 민족을 중흥시켜야 할 그 책임감은 온데간데 없고 달달달달 외우기에 바빴다.

국민학교 3학년 어느 때 소위, 온 산천에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하던 그때' 공산당 북괴는 무자비한 간첩을 남한에 내려보냈고, 가엾은 이승복 친구는 공산당에 항거하는 외마디를 내뱉고 저 세상으로 갔다. '공산당은 싫어요' (보다 정확한 확인 작업이 필요한 말이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승복이와 동갑나기였었다. 그로부터 4월이 지나면서 녹음만 우거지기 시작하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군사독재정부는, 해마다 녹음이 짙어질때면 '녹음이 짙어지는 틈을 타 북괴군의 남침이 우려된다'면서 국민들의 북괴 남침에 대한 경각심을 돋우웠다. 녹음이 우거지면... 그때부턴가? 짙푸른 녹음만 보면 남파되는 간첩 생각부터 난다. 저 녹음을 타고 간첩들은 내려오겠지... 녹음에 대해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綠陰! 요즘이다. 한겨울을 보내고 새 봄을 지낸 가지가지마다 연녹색의 새 잎이 돋아나고 있다. 싱그럽다. 그걸 느낀때는 결혼후 아내와 같이 차를 타고 무주에 가던 어느날, 아내가 갑자기 창밖으로 지나가는 저 연녹색 이파리를 좀 보라면서 환호성을 지를 때였다. 녹음, 정말 싱그러웠다. 이제는 녹음에 대한 선입견은 사라지고 그 싱싱함과 연함부터 느껴진다.

아무튼 그 시절, 시절이라야 60년대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우리는(나는) 그렇게 세뇌교육을 받고 자랐다. 군산에 계셨던 외할아버지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 한번 하시고 그 악수하신 손을 며칠동안 씻지 않으시겠다며 자랑하시던 모습도 기억난다. 그때 나는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통령은 영원히 박정희 대통령밖에 없을 것으로 막연히 생각했고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조차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철없이 지내다가 재수를 하게 됐고, 지금은 익산시로 바뀐 이리시 어느 학원에 다닐때, 아침 거리마다 울려 퍼지던 새벽종 소리에 발맞춰 보무도 당당하게 학원으로 향했다. 그런데로 듣기 편한 노래였었다. 열심히 일해 잘 살자는 내용였다. 아마, 국내 최고의 히트곡은 바로,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일 것이다. 두만강 푸른물에 보다 더 널리, 불리워진 노래일 것이다.

겨우 대학에 들어갔고, 국민의 의무를 빨리 마쳐야겠다는 생각에 군입대를 자원했다. 그때까지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였다. 박대통령은 언제나 변함없이 국가와 민족, 국민을 위해서 존재했다. 그런 박정희 대통령이 어느날 갑자기, 비명에 가셨다.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했는데, 군입대 후, 신병훈련을 받던 3주 가량 지났 을 때 였을 것이다. 백삼보 군번이라, 강원도 화천 부근에서 신병훈련을 받을때 였는데,점심 시간이 돼서 밥먹으러 부대에 돌와왔는데, 부대 방송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이고 엄청난 소식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가슴이 떨렸다. 그러면 전쟁이 나는 것일까? 저 산 바로 넘어가 3.8선이라는데, 우리는 죽었구나! 그날 이후, 우리 신병은 날마다 점호시간에 관물정리하던 괴로움은 잠시 잊고, 따블빽 밑퉁이만 네모 반듯하게 만들면 됐었다. 언제 전쟁날지 모른다며 긴장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머리속에는 ' 이거 총도 제대로 쏠줄 모르는데 전쟁나면 큰일이다'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자대 배치받은 80년 5월초, TV에 비쳐지는 광주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나 있었다. '저 놈들 다 죽여야 돼' 우리는 말야 전방에 와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저런 놈들이 어디 있어? 얼마후 60트럭에 개,돼지만도 못하게 실려 들어 오는 민간인들이 있었는데, 바로 삼청교육대생들였다. 제대후, 복학했지만 80년 광주 얘기는 그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85년 2.12 총선이 돼서야 광주의 실체를 알게 됐다. 지금은 조중동의 가운뎃말이 된 어느 신문의 사설에 광주의 실체를 알리는 글이 실린 것이었다. 아마 김중배 선생의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서야 광주의 실체를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게 됐었다. 그때 광주에 공수부대원으로 투입됐던 한 친구는 광주의 기역자도 자신의 입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는 멋도 모르고 계엄군으로 파견돼, 강원대학교에 진입했었다. 물론, 대대장의 명령 하에 였다. 그 대대장은 계엄군 대장의 위상에 스스로 도취돼 있었다. 군대 얘기가 나오니까, 장황하게 빗나갔다.

박대통령이 떠난지도 어언 25년여가 지나고 있지만, 요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더 짙어지는 것 같다. 실제로, 이번 총선을 거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현존하는 인물로 되살아났다. 위대한 대통령였다. 요즘도, 모 라디오방송국에서 낮 12시쯤이면, 박정희 대통령 생존 당시의 '비하인드 스토리' 夜話가 재미있게 재구성돼 흘러 나온다. 지금도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슬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괜찮은 헌장같다. 다시금 새마을운동을 시작해야 할 판이다. 17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개원때 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사람만 의사당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전체 내용을 다 외우기 힘들다면 첫줄이라도 17대 국회임기 내내, 입에 달고 다니도록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국회때문에, 정치때문에, 국민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정신 재무장을 위한 국회 새마을 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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