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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영화이야기]올드보이(1)

유제호( 1) 2004.04.18 15:44 추천:4

중년 부부 몇 쌍이 어울려 ‘올드보이'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일어서는 순간 그 중의 한 아주머니가 불만 어린 투로 말했다. “에이, 찜찜해." 그리고 누군가가 덩달아 혀를 찼다.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문제의 그 아주머니가 혼잣말처럼--아니 어떻게 보면, 주위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요컨대 방금 본 영화 ‘올드보이'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나아가서는 ‘어딘가' 난삽하고 ‘뭔가' 해괴망측하기 짝이 없다는, 그런 반응이었다.


일반 관객들의 반응: “에이! 찜찜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아주머니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서울 있는 딸에게 전화를 하여 다음과 같이 아예 못을 박았다. “얘야, 혹시 주변에서 ‘올드보이' 괜찮다고 해도 그 영화 절대 보지 마라. 아주 찜찜하더라."

나는 모든 예술 부문에 있어--특히 대중 예술인 영화에 있어서는--전문가들의 박학 비평에 앞서 일반 대중의 즉흥적인 반응을 더 주시하고 또 중시하는 편이다. 사실 일반 대중에게는--얼마간의 개인차와 더불어--전문가들과는 다른 그 나름의 감각, 그 나름의 논리, 그리고 그 나름의 성감대가 작용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들이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개개인의 의식 저변에 부유하는 가운데 유형무형으로 사회 전체를 떠받들고 있다. 따라서 특정 영화에 대한 일반 관객의 반응이 제아무리 단순하고 유치하고 순박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반응 자체에 일정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내가 볼 때 영화 ‘올드보이'의 가장 큰 강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일부 관객들에게 “에이, 찜찜해." 하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극한에 가까운 상황 설정, 잔혹에 가까운 가해와 자해의 복수극, 복합적인 심리 묘사와 의외의 반전, 이 모든 것이 기존의 이야기 전개 방식에 비추어 일차적으로 관객들의 의표를 찌르고 있다. 그리고 근친(近親) 기지(旣知) 상태에 있는 남매 간의 상간(相姦), 근친(近親) 부지(不知) 상태에 있는 부녀 간의 상간(相姦), 전후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서로 다른 이 두 갈래의 ‘근친상간' 자체가 기존의 윤리관에 비추어 이차적으로 관객들의 평상심을 뒤흔들어 놓는다. 요컨대 구성 기법상의 난삽함과 내용상의 해괴망측함이 상승 효과를 자아내면서 일반 관객에게 ‘찜찜한'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함께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관 밖으로 나와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 어떤 이들은 영화 속의 줄거리를 나름대로 재구성하고 재음미하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래서 일단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자기 나름의 크고작은 ‘악행의 자서전'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특히 영화 속의 2중의 근친상간과 역시 2중의 복수극을 자기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입시켜 보고 있었을 것이다.


별자리 구성기법의 의미와 효과

우선 영화 ‘올드보이'의 구성기법은 이른바 중첩된 ‘플레쉬백’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을 내 나름으로 명명하자면 ‘별자리' 구성기법이다.

이같은 구성기법의 원류는 아무래도 누보로망 계열의 소설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예전의 소설(영화)에도 이야기 전개상의 시간적 선형성과 관련하여 소급형 또는 교차형의 서술(구성)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로브-그리에, 미쉘 뷔토르, 끌로드 시몽,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같은 누보로망 소설가들은 연대기적 선형성을 아예 ‘난도질’에 가까울 정도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궁극적으로 시간을 공간화하는 서술기법을 도입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공간적 재구성을 거의 전적으로 독자들에게 일임했던 것이다.

그 한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이었다(그리고 이 소설이 같은 구성기법 아래 영화화되어 우리 나라에도 상영된 바 있다.) 그런데 ‘올드보이’는 그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구성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시간선상의 계기적인 필름을 가위로 난도질한 다음 아무렇게나 뒤섞어 놓은 듯한 이 ‘올드보이’의 구성기법은 관객들 입장에서 보면 ‘불편할’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불쾌하기’도 하다--더 나아가서는 마치 고문을 당하고 있는 듯한 ‘배신감’마저 든다. 사실 ‘올드보이’에서는 크고작은 단위의 시퀀스들이 유난히 급박하게 제시되고, 그러다 보니 관객들에게 전체적 맥락을 재구성할 시간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빠른 템포로 교차되거나 심지어 오버랩되는 단편적인 요소들을 모아 관객들 스스로 시시각각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하는데, 거기에 필요한 연대기와 인과율상의 단서들이 너무 애매하다.

아마 전문가들 또는 세련된 관객들에게는 이런 애매함이 영화가 끝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관객들의 입장에서 보면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위에서 언급한 ‘불편함’, ‘불쾌감’, ‘배신감’이 별로 희석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난 다음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이모저모 곱씹어 보아도 몇 가지 두드러진 장면들과 대사들만--그것도 마치 거대한 은하수에 서로 동떨어진 ‘별들’처럼--뇌리에 반짝일 뿐이고, 그것들이 좀처럼 뚜렷한 형체의 ‘별자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그 별들이 개별 관객에 따라 전혀 다른 형체의 아주 모호한 ‘별자리’로 어른거릴 뿐이다.

어쨌든 영화속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 몇 가지 두드러진 장면들(‘별들’) 중심으로 단편적인 사실들을 열거하자면 아래와 같다.

① 비교적 낙천적인 성격의 샐러리맨 오대수(최민식)의 급작스러운 피납
② 오대수의 15년에 걸친 사설감옥 연금생활: 악행의 자서전과 복수용 체력단련
③ 정체불명자의 최면과 짜여진 각본에 의한 오대수와 미도(강혜정)의 만남
④ 오대수의 적개심과 복수심: 복수를 위한 필사적인 추적과 폭력의 교환
⑤ 미도가 모성애에 가까운 연민으로 오대수를 거두고 성관계로까지 발전
⑥ 납치와 감금을 주도한 이우진(유지태)과의 만남: 5일 말미의 원인규명 조건 제시
⑦ 고난의 원인규명 성공: 고교시절 이우진 남매 간의 성관계 ; 오대수의 목격과 발설과 소문 ; 이로 말미암은 오대수 누나(이수아)의 상상임신과 자살
⑧ 펜트하우스에서 이우진-오대수의 대면: 이우진, 오대수-미도의 부녀관계 폭로
⑨ 오대수의 혀를 짜르는 자해와 이우진의 권총 자살
⑩ 심령술에 의한 오대수의 선택적 망각과 거듭남: 미도, 오대수에게 사랑의 고백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주요 장면들에 비추어 ‘올드보이’에 대한 대부분의 영화평론이 한편으로는 2중의 ‘복수극’에, 다른 한편으로는 두 갈래의 ‘근친상간’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분석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다시 ‘구성기법’으로 돌아오기로 하자. 왜 하필 이런 구성기법을 택하게 되었을까? 왜 이토록 극한적인 사태들을 두고 그 전말에 대해서는 관객들을 거의 ‘오리무중’에 가까운 상태로 방치하는 구성기법을 택하게 되었을까? 내가 볼 때 거기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 같다.

첫째 이 구성기법을 선정성과 서스펜스를 통한 상업성의 확보 수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야말로 우리 시대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문화 ‘상품’인 것을 어찌하랴? 지나칠 정도의 냉정한 계략과 최면과 자살의 장면들(이우진을 중심으로), 그와 정반대로 극한에 가까운 폭력과 자해의 장면들(오대수를 중심으로), 고교생 남매 간의 그림같은 성애의 장면, 누나(이수아)의 투신자살의 장면, 그리고 나중에 부녀지간으로 드러나는 미도와 오대수 간의 격렬한 성애의 장면, 이같은 선정적인 장면들만으로도 관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눈요기감’이 된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장면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교차 배열됨으로써 에로틱한 ‘눈요기감’이 가미된 강렬한 ‘서스펜스’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쯤 되면 입소문을 통한 고도의 상업성이 확보될 수밖에 없다. 설령 불만 투성이의 관객이 적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 관객들도 다 요금은 지불했을 테니까...

둘째 이 구성기법을 지나치게 도발적인 메시지에 대한 면죄부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중에 계속되는 글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영화 ‘올드보이’에는 특히 근친상간과 관련하여 기상천외의 도발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영화 속의 두 갈래의 근친상간에 있어 우선 주목할 것은 그것이 모두 ① 폭력이 배제된 합의된 성관계라는 점, ② 상대적으로 여자 쪽에서 남자를 배려하는 강도가 더 높다는 점, ③ 단순한 성적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라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두 갈래의 근친상간이 모두 ‘폭력'도 없고 '조건'도 없고 ‘가식'이나 ‘무지'도 게재되지 않은 지순한 사랑으로 격상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화 ‘올드보이’는 이렇게 기존의 ‘금기’를 위반한 데 대한 ‘똘레랑스’를 은연중에--아니, 거의 노골적으로--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올드보이’의 감독은 이 점에 있어 아주 영악했다. 이처럼 위험천만한 도발적인 요구를 하면서도 관객들을 혼란케 하는 ‘오리무중’의 구성기법을 통해 스스로 면죄부를 발부받아 놓았으니까 말이다.

셋째 이 구성기법을 영화라는 장르의 강점을 살린 독특한 예술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은 똑같은 도발적인 메시지가 ‘학술담론상으로’ 버젓이 요구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볼 때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와 똑같은 메시지가 ‘소설’ 형식으로 출판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제2의 마광수, 제2의 장정일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메시지가 전통적인 기법에 의존하여 영화화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관객들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언어예술과 순수예술의 중간 지대에 놓여 있는 영화라는 장르의 상대적인 강점이 드러난다. 각양각색의 ‘금기’를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를 우회적으로 문제삼고 점진적으로 희석시키는 데 있어 학술담론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소설이나 시나 희곡에 비해서도 영화가 탁월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올드보이’는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구성기법상의 독특한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중복 대사들과 도발적 메시지

한편 영화 ‘올드보이’에는 아래에 열거한 이우진(유지태)의 네 가지 대사(또는 글귀)가 각기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꼭 두 번에 걸쳐 나타난다. 그리고 내가 볼 때 이같은 반복성과 더불어 바로 그 대사들에 앞의 글에서 언급한 복수극의 내재성과 외향성에 상응하는 이중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 대사들에 대한 표층, 심층의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고 특히 심층에서는 ‘감독’의 도발적인 메시지가 엿보인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말이 너무 많아.”

“내 이름이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산다해서 오-대-수라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렇게 내뱉는 오대수(최민식)는 비교적 ‘낙천적인’ 성격의 소박한 샐러리맨이다. 만취 상태로 지하철 객차 안에서 오줌을 누려고 한달지(아예 오줌을 누었던가?), 파출소에서 풀려나면서 그냥 나오면 될 것을 기어코 두 팔로 ‘엿먹어라!’를 먹이고 나온달지,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별로 밉지 않은 ‘개구쟁이’ 샐러리맨이기도 하다. 한편 오대수가 평소에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단서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이우진(유지태)의 입장에서 보면, 적어도 고교시절 어느 시점에서는 오대수가 “말이 너무 많았다.” 당시 그가 누나(이수아)를 사랑하고 누나와 함께 자기도 했는데 우연히 이것을 엿본 오대수가 입소문을 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누나가 상상 임신에 이어 끝내 투신 자살을 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우진의 입장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오대수가 한때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우진이 복수의 일환으로 오대수를 납치하여 무려 15년 동안 사설감옥에 감금한 이유일 뿐만 아니라, 감금 1년만에 오대수의 부인을 죽여 오대수를 그 피의자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더욱 더 철두철미한 복수를 위해 15년만에 그를 ‘풀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15년' 역시 표층상으로는 오대수가 피의자가 된 부인 살해의 ‘공소시효'이지만, 심층에서 보면 오대수의 딸 미도의 적정선의 ‘성장기간'이다. 이렇게 15년을 기다린 이우진이 복수의 마지막 단계로 오대수로 하여금 자기보다 한 등급 더 높은 ‘근친상간, 즉 부녀지간의 성관계를 하도록 만든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오대수가 그러고도 살아남게 만들 뿐만 아니라 살아남아 계속 딸과 자도록 만든다.) 참으로 통렬한, 기상천외의 복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평론가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혀’ 조심, ‘주둥이’ 조심, ‘말’ 조심을 해야 한다고. 그것이 영화 ‘올드보이’에 담긴 메시지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천만의 말씀이다. 이우진이 오대수를 상대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누나가 죽은 것은 내 좆 때문이 아니라 네놈의 혀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을 위와 같은 지극히 평범한 메시지로 해독하는 것은 표층의 해석에 불과하다. 영화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이 말이 등장인물 이우진을 통하여 ‘감독’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섬뜩한 말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남자의 ‘성기’가 여자를 상대로 일방적인 폭력 없이 기능한다는 것은 곧 당사자들 간의 내면적 ‘합일’을 뜻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우리가 그토록 예찬하고 갈구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한편 ‘혀’는 곧 ‘말’을 뜻하고, ‘말’은 곧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우진 남매의 사랑이 파국을 맞고 끝내 누나가 죽은 것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말’, 즉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거창한 ‘주의’만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불특정 집단이 아무 근거 없이 당연시하는 각양각색의 고정관념이 다 이데올로기이고, 일상의 수준에서 보면 이런 이데올로기가 더 무서운 구속력과 파괴력을 발휘한다.

(2)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바닷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야.”

이우진의 이 대사를 표면적으로 해석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오대수의 ‘혀’ 때문에 이우진의 누나가 투신하고 강물에 가라앉아 죽었다. ‘혀’로 죽였든, 다른 어떤 방식으로 죽였든, 어쨌거나 이우진의 입장에서 보면 오대수 때문에 그의 누나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역시 이우진의 입장에서 보면, 오대수는 이렇게 살인을 자행했으면서도 “남의 일이니까 다 잊어버리고 편하게 살아왔다.” 부인이 있고 어린 딸이 있는 ‘낙천적인’ 샐러리맨 가장으로서 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 이우진이 아마 오대수의 부인을 상대로 청부 살인을 자행했을 것이다. 혀’로 죽이든, 직접 살해하든, 청부 살인을 하든,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가 누군가에 의해 죽게 되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다 마찬가지다. 이렇게 볼 때 위의 대사에 담긴 표층적인 의미는 수단과는 별개의 ‘죽음’이라는 결과론적 불행의 공통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우진의 청부 살인을 정당화해 주는 셈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이 대사 또한 영화의 심층에서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모래알’은 ‘바윗돌’의 부식물이다. 달리 말하자면 ‘바윗돌’이 곧 ‘모래알’의 생성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것을 신화적으로 해석하자면, 인류 전체가 ‘하나의 바윗돌’에서 생겨났고 우리가 저마다 ‘하나의 바윗돌’에서 생겨난 ‘모래알’인 셈이다. 요컨대 우리는 저마다 근원적으로 ‘근친상간’의 부산물들이다.

따라서 이 대사의 심층에서 문제되는 것도 내가 볼 때는 우리가 그토록 예찬하고 갈구하는 ‘사랑’, 그리고 그 표현으로서 일방적 폭력 없이 당사자들 간의 합의 아래 이루어지는 ‘성관계’이다. 달리 말해 이 대사의 심층에 다음과 같은 물음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근친상간’인가? 왜 그것이 단죄되어야 하는가? 그 준거가 무엇인가? 왜 ‘사랑’을 그토록 예찬하고 그 표현인 ‘성관계’를 그토록 갈구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 근거 박약한 금기를 앞세워 상호 감시와 상호 통제와 상호 단죄의 덫에 갇혀 있는가?

(3) “웃어라, 모든 사람들이 너와 함께 웃게 될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사설감옥 달력에 기재된 글귀로서 역시 일정 시차를 두고 두 차례에 걸쳐 나온다.)

이 글귀도 표층에서 보면 일단 사설감옥에 갇힌 오대수에게 ‘탈출’과 ‘복수’를 결행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우진의 입장에서 보면 다음 단계의 복수를 위해 오대수가 어떻게든 사설감옥에서 ‘탈출’하여 역방향의 ‘복수’를 결행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것이 이우진의 계략대로 맞아떨어진다. 오대수가 ‘적개심’에 불타 필사적인 체력단련에 돌입하고 젓가락을 이용하여 벽에 탈출구를 뚫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글에서 언급한 '외향적인‘ 복수극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이 글귀도 그렇게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이우진의 최면 계략에 따라 탈출한 오대수와 미도 간에 서로 부녀지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가운데 사랑이 싹트고 그 연장선상에서 헌신적이고도 격렬한 성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사랑과 성관계의 상대가 바로 자기 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오대수가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이우진(또는 ‘감독’)은 오대수로 하여금 ‘웃도록’ 독려하고 있다. 아니, 적어도 ‘울지’ 말도록 강제하고 있다. 거슬러오르고 또 거슬러오르면 우리가 저마다 ‘근친상간’의 부산물인 것을, 그런 가운데 저마다 그것을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을, 근친상간도 우리가 그토록 예찬하고 갈구하는, 아니, 그 이상의 지순한 ‘사랑’일 수 있는 것을..., “울어라, (그래 보았자)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 그러니 차라리 ‘웃어라.’ 지금 당장 누가 뭐라고 하든 일단 너가 한 번 ‘웃어’ 보아라. 더군다나 너도 잘 알다시피 나(이우진)는 ‘알고도’ 누나하고 잤다. 그런데 너는 ‘모르고’ 딸하고 잔 것에 불과하다. 그게 무슨 크게 탓할 일이냐? 그러니 ‘울지’ 말고 ‘웃어라.’ 그러면 그것을 계기로, 너나 없이 수 천 년 묵은 위선의 가면을 벗고, “모든 사람들이 너와 함께 웃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이우진)도 ‘웃고’ 저승의 누나도 ‘웃게’ 될 것이다.

(4) "노루가 사냥꾼으로부터 벗어나듯이, 새가 그물에서 빠져나오듯이, 스스로 구하라.(구약성서 [잠언] 6장5절)

이우진이 오대수를 상대로 이렇게, 역시 두 차례에 걸쳐, ‘스스로 구하라’고 이죽거리며 주문한다. 무엇을 구하라는 것일까? 내재적인 복수극의 수준에서 오대수가 ‘스스로 구해야’ 할 것은 일단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이우진이 오대수를 상대로 벌이는 복수극의 원인을 ‘스스로 구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오대수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구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이우진 자신이 ‘죽어 주겠다’는 것이었고 이 약속은 실제로 지켜졌다.

하지만 이우진(또는 ‘감독’)이 자행하는 외향적 복수극의 수준에서 보면 이와 관련해서도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이우진의 누나(이수아)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이우진 역시 ‘스스로 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우진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누군가를 통한 사후-사후(事後-死後)의 구원이 절실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 남매 간의 사랑을 '사후' 복권시키고 나아가서 사랑했던 누나를 '사후'에 되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우진(이제는 차라리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이우진과 그의 누나에 비해 한 등급 더 높은 ‘근친상간’의 당사자 오대수가 ‘스스로 구하는’ 데 성공해야 한다. 제아무리 기상천외의 작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그래서 오대수가 ‘스스로 구하는’ 길에 나서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기왕의 ‘악행의 자서전’을 보완하고 거기에 “나는 혀가 없습니다” 하는 말을 덧붙여 심령술녀에게 보냄으로써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 결과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기상천외의 작위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마치 눈에 덮인 에덴동산처럼 여겨지는 설원에 갑자기 오대수와 심령술녀가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오대수가 구원의 편지에 담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닙니까?” 하는 말에 감복했다는(?) 심령술녀의 도움 아래, 오대수가 선택적인 기억상실에 성공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난다. 요컨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미도는 물론이려니와, 이제 새사람으로 ‘거듭난' 오대수에게도 미도가 자기의 ‘딸'이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 역시 갑자기 미도가 나타나고, 미도가 오대수를 끌어안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미완의 결론

유형무형의 금기에 오래도록 유순하게 길들여진 우리 모두의 평상심에서 보면 영화 ‘올드보이’의 심층적 메시지가 이렇게 도전적이고, 도발적이다. 아니, 금기의 주체인 권력과 자본(‘사냥꾼'과 ‘그물')을 상대로는 심지어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이우진의 누나(이수아)를 죽인 것은 사실 오대수의 ‘혀’가 아니었고, 이우진(또는 ‘감독’)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혀’는 곧 ‘말’을 뜻하고, ‘말’은 또 각양각색으로 채색된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우진의 누나(이수아)를 죽인 것은 그 이데올로기의 생산자인 자본과 권력, 그리고 거기에 길들여져 그것을 재생산하고 있는 우리 모두다.

이렇게 볼 때 영화 ‘올드보이’는 다름 아닌 우리 모두를 상대로 하는 은밀한--아니, 상당히 노골적인--복수극이자 선동극이다. 그리고 영화 ‘올드보이’의 관객들은 아까운(?) 돈을 지불한 가운데 실컷 얻어맞고 나온 셈이다. 어디를 왜 어떻게 얻어맞았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기껏해야(?) “에이! 찜찜해.” 하고 혀를 끌끌 차며 영화관을 나온 셈이다--하지만 아주 긴 호흡에서 보면, 어쨌거나 자기 성찰이 곁들인 바로 이런 반응의 점진적인 축적이 매우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2부로 이어짐]


- 유제호 / 전북대교수·불문학
- <열린전북>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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