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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누더기 친일규명법’ 개정해야

최재흔( 1) 2004.03.02 13:26 추천:3

해방 60년을 눈앞에 둔 오늘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작년 광복절에 국회의원 154명이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이하 특별법)을 발의했다.

기나긴 표류 끝에 국회법사위에 상정이 되었지만, 법사위 간사인 김용균 의원과 참여정부의 반대로 좌초될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입법취지가 진상규명에 있는데도 국론분열이니, 친일파 후손들의 명예훼손이니 등을 거론하면서 법안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수정을 가했다.

진상규명을 저해하는 지엽적인 조항을 삭제하거나 신설하고, 민간에서 진행되고 있는 친일청산 연구활동에 족쇄를 채우는 불순한 내용도 집어넣었다. 결국 특별법은 특정 친일파 세력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뜯어 고쳐진 채로 우여곡절 끝에 지난 달 26일 법사위를 통과하였다.



누더기 수정안, 오히려 친일행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본회의에서 누더기가 된 수정된 법안을 폐기하고 특별법 원안대로 상정하여 통과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법사위를 통과한 특별법은 개악된 법안 그대로 통과되고 말았다.

한나라당의 김용균 의원을 비롯한 일부 의원들에 의해 휘둘려진 특별법은, 애초의 법안 제정의 정신을 살리지 못함은 물론 수족이 잘려 특별법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법안대로 시행된다면, 친일진상규명은 사실상 할 수 없다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오히려 친일행위진상규명을 저지하고 친일행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 죽 쒀서 개주는 꼴이다.

개악된 주요 내용은 첫째, 조사대상을 대폭 축소하거나 제한함으로써 사실상 진상규명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창씨개명 주창 권유자, 헌병, 헌병보조원, 조선사편수회 관여자, 토지조사사업 등 경제수탈 종사자 항목을 삭제하였고, 일제의 군인은 중좌(중령)이상 판검사, 고등문관이상으로 제한하여 극악한 친일분자라 하여도 절대 다수가 면죄부를 받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예상된다.

일제의 중좌 이상만 조사대상이 되면 홍사익과 김석원(장군급)만 대상자가 되고 나머지 위관급 장교들은 모두 제외된다.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 장교로서 항일운동세력을 탄압한 사람들은 대부분 위관급인데 이들은 제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조항에 공통적으로 ‘전국적 차원에서’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자 만을 조사하도록 했다. 지방 유지로서 친일부역행위에 대한 조사를 원척적으로 봉쇄했다. 그 의도가 아주 불순하고 자의적이다.

둘째, 조사대상자와 가족 등 이해관계자들의 이의신청 권한과 보호를 받을 권리는 대폭 강화시킨 반면, 조사위원회의 조사권은 각양의 단서를 달아 규제함으로써 조사활동을 위축시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셋째, 위원회의 조직상에 문제가 많다. 위원 추천권을 국회가 행사하게되어 있고, 위원의 임기를 3년으로 조사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시켜 놓았다. 위원회의 권위와 안정성을 훼손시키고 조사가 부실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넷째, 가장 큰 문제는 위헌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제23조 조사대상자의 보호 조항에는 “누구든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의 기간 중 행정기관, 군대, 사법부, 조직, 단체 등의 특정한 지위에 재직한 사실만으로 그 재직자가 이 법에 의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으로 신문, 잡지, 방송,(인터넷신문 및 방송포함) 그 밖의 출판물에 의하여 공표 하여서는 아니 된다.” 라고 임의적이며 모호한 규제 항목을 적시했다.

이어 제 29조의 벌칙 조항에서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등의 엄중한 처벌규정을 둠으로써 헌법상의 기본권인 언론 출판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인함은 물론 진상규명의 권한을 위원회가 독점적으로 수행케 하여 민간 학계의 연구조사나 언론의 추적보도가 아예 불가능하게 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개악된 법안이 시행된다면 그에 따른 모순과 부작용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민족의 정신세계를 오염시킨 친일문학 예술인, 교육자, 언론인, 지식인의 대다수는 친일의 혐의를 벗겨 줄 수 있는 빌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섰던 일제의 하수인들이 모조리 면책될 것이다. 한편 조사위원회는 이런 저런 규제로 권한이 축소되어 진상규명의 작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민의 힘을 얻어 추진되고 있는 민간의 연구를 크게 위축시킬 위험이 대단히 높다.


역사의 정의와 민족의 정기 바로 세우기 위해 원안대로 개정되어야

결론은 친일진상규명 저지법으로 변질된 특별법은 결코 시행되어서는 안 될 악법이다. 반민법과 반민특위의 정신에 어긋나며 위헌의 요소가 많아 문제가 많은 악법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친일파들에게 친일의 혐의를 벗겨주는 면죄부가 될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개악된 특별법은 법제정의 정신을 살리고 역사의 정의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드시 원안대로 개정되어야 한다.

역사문제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일부에서는 통과된 특별법이 독소조항이 많지만 진상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법의 정신을 살리며 친일행위의 진상조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법안 심의과정에서 보듯 친일세력들의 방해가 얼마나 집요했는가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국민의 힘을 모아 개악된 특별법의 시행을 저지하고 제대로 된 특별법을 만들자.


-민족문제연구소 최재흔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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