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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정현의세상보기] 삼보일배 영상(23)

문정현( 1) 2003.05.12 18:13 추천:1

한 외국인에게 삼보일배를 설명했다.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했다.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하는 수 없이 영어로 풀이를 했다. “Three Steps One Bow”라고 말했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한 발 걷고, 두 발 걷고, 세 발을 걸은 다음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부안 해창갯벌에서 서울 청와대까지 305Km다. 그런데 삼보일배로 200Km를 넘어 평택까지 왔다. 앞으로 평택, 오산, 수원, 과천, 여의도, 광화문에 까지 갈 것이다. 그 때서야 비로서 눈을 둥그렇게 뜬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용을 설명한즉 지대한 관심을 표명할 뿐 아니라 적극적 지지를 하였다.


이주향 교수(수원대) 삼보일배 대담

2003년 5월 8일 어버이 날, 부처님 오신 날 -경기도 땅을 밟던날



삼보일보배를 시작하기 전에는 밥걱정을 하였다. 끼니마다 해먹거나 사먹기로 하였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한번도 사먹은 일도 해먹은 일이 없다. 길을 갈 수록 공양은 넘치고 넘친다. 미리 신청하지 않으면 차례를 얻을 수가 없다.

요즈음 자주 어느 성당에 자리를 잡아 노숙을 한다. 본당신부님은 노숙에 대해 이해를 못하신다. 으레 사제관에 잠자리를 생각하신다. 그러나 철저한 노숙이다. 성당 마당에 천막을 치고 잠을 잔다. 신부님은 무엇이라도 돕기를 원하신다. 내일 아침밥을 성당에서 하지요. 하지만 차례가 아니다. 몹시 아쉬워하신다. 이런 모습을 자주 본다.

요즈음 대통령의 국민에게 보낸 이 메일 편지의 “잡초”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새만금을 구상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을 잡초보다 더한 “독초”라고 한다. 그러기에 성직자들의 혹독한 수행이 요구되나보다. 이렇게 마음아파하고 있다. 엄청난 수행이 서울에 이르기 전에 끝나기를 기원한다.

임시로 물코를 터 유지하고 있는 시화호 공사를 비극이라고 하면서 무조건 사업을 중단하라고 소리 놓여 말하고 있다. 여의도 광장 140배의 뭇생명을 죽이는데 대한 분노가 표출될 법하지만 묵언 중 엄숙한 분위기에 분노를 삭힌다. 자연을 죽여? 제 삶의 자리를 파괴하는 것은 자승자박이다. 이제라도 집어치우라. 갯벌은 바다의 어머니시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업을 중단하라. 절박한 표현이 오고 간다. 인간이 인간의 제 자리를 찾으라는 것이다.

계화도의 고은식 님이 성직자들의 수행에 몸으로 동참할 수 없어 견디지 못해 혼자 하루 3-4시간 씩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다. 당장 쫓아가 함께 하고 싶다.

사실 나도 병이 났다. 입술이 불어트고 삭신이 아파 처박아놓았던, 잘 쓰지도 않던 전기 안마기를 꺼내 어깨, 팔, 다리, 허벅지를 두들기며 잠을 청한다. 혼자 뇌까린다. 내가 삼보일배를 하고 말지, 그 꼴을 볼 수가 없구나! 사실 삼보일배 수행을 할 참이다.

아예 밀쳐낸다. 용납을 하지 않는다. “증명대사”나 되라고 한다. 그게 무슨 뜻인 알아듣지 못했고 말조차 잊곤 하였는데 하도 듣는 바람에 이제야 쉽게 기억할 수 있다. 지켜만 보면 된단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나더러 증명대사는커녕 “울보대사”라고 한다. 하도 울고 다니기 때문이다.

요즈음 나는 초상집의 상주와 같다. 엉엉 슬프게 울다가 새 손님이 나타나면 그 앞에 서서 더 크게 울고나서 울기만 할 수 없으니 도란 도란 일사를 이야기 하다가 설어움, 분노를 잊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나는 캠코더 가방, 디지털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앉았다 섰다가 구부렸다 섰다한다. 때로는 맨 땽에 주저 앉아서 촬영를 한다. 수행자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양 옆으로 가서 촬영을 한다, 멀리 떨어져서도 촬영을 한다. 앞으로 가다가 뒷걸음치고 천천히 걸었다가 뛰기도 한다.

나는 손이 모자라다. 지팡이를 팔에 걸치고 다니는게 일수다. 나는 원숭이처럼 높은 곳이면 올라간다. 육교로 올라가고 길가 모래통에라도 올라가고 남의 집 옥상에도 올라간다. 높은 곳이 보이면 어디라도 올라간다. 이러다가 아이의 손을 잡고 서서 눈물바람을 하는 여인을 보면 덩달아서 운다. 코 먹은 소리로 말을 건넨다.

나는 지금 심각하다.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40일 넘도록 아스팔트를 기어오고 있다. 자동차의 매연도 매연이려니와 지열 때문이다. 교통혼잡을 호소하는 성난 운전자는 악스레타를 힘껏 밟아 더 큰 매연을 품는다. 손 바닥을 아스팔트 바닥에 대 보았다. 덥다기보다 따끈 따끈하다. 여기에 얼굴을 드리대니 땀이 비오듯 한다.

이렇게 많은 땀을 흘려도 이상이 없을까?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 걱정이다. 걸음을 멈추고 쉬면서 땀을 닥는 시간에 수행자들에게 쫒아가 끌어안기 일수다. 가까이 서성거리기도 한다.

나는 들었다. 수경과 문신부, 서로의 귓속말을 들었다. 현기증이 난단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또 한번 울컥하였다. 잠시 후 흔연히 물었다. 땀을 많이 흘리니 현기증이 나지? 둘 다 큰 소리로, 아니요. 아직은 괜찮아요. 거짓말이다. 내 앞에서 잡아 떼고 있는 것이다. 나를 속이고 있다. 그러니 얼마를 더 갈지 걱정이다.

아하. 이제야 시간이 오나보다. 쓰러질 날이 올려나 보다. 119에 실려가야하는 시간이 다가오나보다. 안돼. 절대 안돼 여기 까지 왔는데 끝까지 버텨야 된단 말이다. 부처님, 대종사님, 하느님 저들을 지켜주소서. 힘을 주소서. 끌어주소서. 간곡히 빕니다. 과천 종합청사,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화문 청와대를 몇 바퀴씩 빙빙 돌고 돈 다음에 쓰러지게 하소서.



[아침을 열며] 묵언의 새만금에 답하라


"낙화는 정이 있어 흐르는 물을 따라 가고, 흐르는 물은 정이 없어 낙화를 흘려보낸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대선사 진제 스님이 던지셨다는 화두다. 유정과 무정의 경계를 단숨에 허물어버리는 그 화두의 힘은 너무나 강렬해서 문득문득 나를 찌른다.

대선사는 유정과 무정의 경계 없음을 보여줬건만 여전히 유정한 나는 부처님이 오셨다는 그 날, 그 동안 일방적으로 정이 든 사람들을 찾았다.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305Km를, 세 걸음에 한 번씩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 그들은 문규현 신부고, 수경 스님이며, 이희운 목사고, 김경일 교무였다. 세계 5대 갯벌 중에 하나, 여의도 면적으니 140배나 되는 새만금 갯벌을 살려달라고, 전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할 끔찍한 생명파괴 사업을 중단하라고 그들은 목숨을 건 기도의 행진을 하고 있다. 3월 28일 새만금 바닷가를 떠나 김제-군산-보령-예산-아산-천안을 거쳐 평택까지 온 것이다.

벌써 평택이었구나, 스스로 유정하다고 생각한 나는 얼마나 무정한가. "벌써" 평택이라니! 새만금 바닷가를 떠난 지 42일인데, 그 42일 동안 낮에는 기어가고 방에는 천막을 치고 거리에 누웠는데.

그들은 이제 묵언이다. 묵언 중인데 답답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강렬하다. 진제 스님의 화두의 강렬함이 화사하다면 온 몸, 온 태도가 화두인 이들의 강렬함은 엄숙하고 비장하다. 목숨을 건 참회의 기도 수행 중에 입까지 닫아버리다니, 묵언의 의미는 뭘까...

말하지 않겠다는 건 듣지도 않겠다는 거였다. 정이 듬뿍 들어 이제는 그들 자신이 되어버린 새만금의 운명을 놓고, 여전히 방조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느니, 미군측에서 150만평을 요구했다느니 하느 소문을 듣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런 어지러운 소문을 들어 슬픔을 갖고 분노를 품어 기도하는 마음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새만금 개발을 강행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마음도 내려놓고, 새만금에 대한 연민도 내려놓고,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자만심도 내려놓고, 지금껏 살아온 삶을 참회하겠다는 거였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만 괜찮으면 괜찮은 것이라는 이기적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지금 당장 돈이 되고 편하기만 하면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마귀처럼 마구잡이식 개발로 어머니 자연을 난도질하지는 않았는지. 그들의 걸음걸음에 우리가 아픈 것은 거기에 우리가 지은 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명은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다. 산이 죽으니 강이 죽고, 강이 죽으니 바다가 죽는다. 개펼이 죽으니 바다생명이 죽고, 바다 생명이 죽으니 바다가 죽는다. 자연을 죽이고 건설한 인간의 도시는 거대한 머지군단에 짓눌려 있고, 미세한 먼지군단에 짓눌려 있는 인간의 폐는 늘 감기 걸릴 준비를 하고 있다. 숲은 우리 몸 밖의 페라는 사실을, 숲이 황폐해져 우리 폐에 먼지가 쌓여 가니, 그제서 겨우 배운다.

새만금사업의 목적은 농경지였다. 김대중 정부는 쌀 부족을 이유로 새만금 간척사업을 강행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쌀은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 돈다. 남아 돌아 정부는 매년 엄청난 농지를 용도변경해주고 있고 이제는 대대적으로 휴경농에 대한 보상제도까지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적인 개펄에 엄청난 돈을 들여 차린 죽음의 굿판을 멈추지 않다니.

어떤 사업이든 목적이 사라졌으면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 논란이 되지 않은 사업의 경우도 그러할진대 거대한 반대에 직면한 사업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농지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즉각 중단하고 새만금 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정책 기구를 긴급히 만들어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주향 수원대 인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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