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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화연재] 류경호의 문화읽기(4)

류경호( 1) 2003.04.19 11:23

비가 오는 어느 날 밤, 중년에 접어든 한 남자가 숙직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때 난데없이 깜찍하게 생긴 소녀가 비에 젖어서 찾아온다. 그는 이 젊은 소녀를 집으로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소녀는 말을 듣지 않고 남자를 유혹한다.

이 남자는 중년에 접어든 이 날까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왜 살아 왔는가, 50대 후반의 한심스런 정년퇴직을 앞두고 고민에 휩싸이게 될 즈음 밤참으로 샌드위치를 가지고 부인이 숙직실로 찾아오자 당황한 이 남자는 소녀를 소파에 급히 숨긴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것은 하나의 환상이었을 뿐이다. 그는 어느덧 현실로 돌아오는데 소녀의 웃음소리가 기적 소리처럼 울리며 자신을 비웃는 것이다.

얼음의 비중은 물의 0.917배

이것은 지난 1977년에 발표한 이현화의 ‘0.917’이라는 제목의 연극공연 줄거리이다.

얼음의 비중은 물의 비중의 0.917 배이다. 즉 동일한 무게의 물과 얼음의 부피를 비교해 보면 얼음의 91%가 물 속에 잠겨있다. 물 속에 잠긴 진실의 양은 우리가 겉으로 보는 현실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 보여지는 진실과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얼음이 다 녹아도 물의 부피는 이전과 똑같다는 물리적 관점에 적용하여 잠재한 인간 본연의 심리를 다루고자 했던 이 공연은 과거 독재정권 시절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위의 작품은 결국 얼음이 녹더라도 물의 높이가 조금도 바뀌지 않는 것처럼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진실은 빙산의 일각 속에 감춰진 몸통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가 자연 현상과 인간의 이상 그리고 현실 관계로 설정하여 감춰진 거대한 힘에 의해 돌아가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강자들의 힘의논리로 지배되는 세계질서의 진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으로 한참 들끓고 있는 국내외 정세는 우리나라가 난처한 것 같다. 파병 반대시위로 국회의 파병안 처리는 계속 연기되어 대통령이 설득에 나서고 세계적 반전 여론이 거센 가운데 미영 연합군의 공격 상황도 곤란한 것으로 연일 보도되면서 미국은 명분도 애매한 전쟁을 승리하겠다고 장담한다. (이 글은 3월 말에 쓰여진 것입니다.)

약자들을 힘의 논리로 지배하려는 세계질서는 민중들의 저항에 주춤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강자들은 빈약한 명분과 자국의 안전을 위한 무차별 공격을 일삼으며 무고한 민간인들이 처참한 죽어가고 있다.

겉으로 보여지는 얼마 되지 않는 진실 저편에 항상 강자 중심의 질서로 존재하는 우리의 현실이 슬프다. 얼음이 녹아도 변하지 않는 물처럼 말이다.



* 필자는 40년이 넘는 지역 연극 역사를 갖고 있는 전주 창작극회에서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앞으로 연극인으로써 또 생활인으로써 느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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