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오피니언

더 잘 닦고 곧게 해야 할 길

편집팀( 1) 2002.12.29 14:52

‘서두르지 마십시오. 천천히 가십시오. 길은 외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간 곳까지만 길입니다’.

이철수 판화가의 말인데, 한 해를 마감하는 자리에서 더더욱 와닿습니다.

최근 서른하나에 전혀 예상치 않은 병으로 생을 마감한 동료 신부의 죽음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누구나가 그렇듯이 먼 길을 보고 걸었는데, 우리가 보기에 길 중간에서 멈춰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아직도 앞길이 창창했다는 아쉬움을 표하고, 남아있는 길을 애달아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일이 우리의 일이라고 한다면, 그가 간 곳까지만 길이었다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길이란 것 자체가 도무지 길이의 척도로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함께 해 나가는 맹인선교회에는 한 무리의 청년자원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늘 듬직하고 대견한 모습으로 앞을 보지 못하시는 분들을 돕기에 한 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 청년들인지를 물었고, 거의 다가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야 되고, 어떤 이는 하루종일 기름때를 묻히고 살며, 여름이나 겨울이나 한결같이 냉동창고에서 일하는 이도 있었고, 트럭에 잡동사니를 지고 다니면서 이 동네 저 동네를 도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한 덩어리로 뭉쳤는지를 물어보니 돌아가신 그 동료신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년예수회’를 만들었고, 바로 그 청년들이 이제 쉬는 날을 이용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또 다른 이를 위해 봉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짧은 생애를 마감하시면서도, 다른 이가 주저하고 망설이며, 어쩌면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 만 그 길을 잘 다듬어나간 것입니다.

길이의 척도로 계산될 수 없는 길

그렇다면, 길은 길이의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누가 그 길을 정성들여서 잘 닦고 곧게 했는지가 중요하지, 앞길을 건성건성 다듬고서도 먼 길만을 간다는 것이 꼭 의미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다른 한 해가 올수록, 우리가 지나온 길과 갈 길을 더듬어 보며, 앞으로 남은 길을 셈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시간적인 길이로서가 아니라, 삶의 깊이가 담긴 길로서 자리한다면, 우리 역시도 우리가 간 길의 짧고 긴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만큼 잘 닦고 곧게 했는지에 더 비중을 두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더욱 더 ‘그 길’을 잘 닦고 곧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박동진 신부 (노동자의집 지도신부)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