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오피니언

디아스포라를 아십니까?

[강연 후기] '서경식의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차별과 배제의 땅 후쿠시마'

유기만 (민주노총 전북본부 조직국장)( jbchamsori@gmail.com) 2017.03.16 10:43

처음 강의 제목을 들었을 때 낯선 단어 하나가 거슬렸다. 혼자 “저런 일반적이지도 않은 말로 강연 제목을 달다니!”하며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귀찮음을 강의 제목을 정한 사람의 탓으로 돌렸다. 디아스포라....특정 인종 집단이 자의적이든지 타의적이든지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 항구적으로 나라 밖에 자리 잡은 집단 등 포털 사전을 찾아보니 인류 역사에서 보면 낯설지 않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디아스포라이다.

그러니 강의 제목인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차별과 배제의 땅 후쿠시마”는 일본에 사는 “제일조선인의 눈으로 본 차별과 배제의 땅 후쿠시마”인 것 아닐까? 군사독재 시절 형 두 명이 모두 간첩협의로 체포되어 한국에서 옥살이를 하고 제일조선인으로 일본 땅에서 살아온 서경식 교수에게 디아스포라는 삶 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크기변환_DSC01562.JPG

 

강의를 듣고 나서 차별과 배제의 땅 후쿠시마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지만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에게 디아스포라의 시선이 있었던가? 물론 디아스로라는 개인의 경험이 아니고 인종이나 집단에 대한 이야기지만 산업화 당시 농촌에서 도시로의 강제 이주는 디아스포라인 것인가? 디아스포라는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지 않을까?

강의 제목만 살펴보면 하나하나가 참 힘든 주제들이다. 후쿠시마도 그렇고 차별과 배제도 그런데다가 디아스포라의 눈이라니... 내겐 듣는 것만으로도 우울하고 슬프고 절망적인 주제이다. 이러 이야기를 굳이 시간을 내어 듣는다는 것은 외면하고 싶은 일이지만 여러 가지 복합적인 끌림으로 사전 지식도 없이 강의에 참여했다.

서경식 교수는 나와 반대로 배제와 차별의 땅 만 찾아다니는 듯 하다. 역사 속에서 디아스포라의 배제와 차별을 들추어낸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되는지 묻고 또 묻는다. 체르노빌은 왜 후쿠시마로 반복되는가? 왜 일본에는 그것에 대한 저항은 없는 것인가? 왜 이런 물음을 하는 사람들은 소수로 되어 가는가?

모두가 떠난 땅 후쿠시마에 남아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그곳을 일구는 사람들. 떠날 수도 없는 사람들. 그것을 감추고 왜곡하는 사람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경험하고서도 달라지지 않는 모습들과 더 우경화 되어가는 일본.
그리고 서경식 교수는 “한국은 어떤가?” 하고 묻는다.
왜 그런 것인가?
왜 망각되어 버리고 또 다시 반복되는 것인가?
강의 내내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서 어떤 초연함을 듣는다.

그는 우리에게 조만간 자신이 경험한 운명 같은 일들이 인류 곳곳에서 발생할 것이고, 그 속에서 배제와 차별이 반복되어 나타날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그것은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운명이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고,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차별받는 사람들이 생길 거라는 것을 예언자의 눈으로 보는 것일까?

두려워서 피하고 애써 외면하면서 감정과 이성이 점점 작아져버린 나는 서경식 교수의 강의에서 거대한 정신을 만난다. 강의 후 그의 책을 읽고 있다. “내 서재 속의 고전” 부재가 “나를 견디게 해준 책들”이다. 책과 여행과 예술과 역사의 만남을 독서 여행처럼 엮은 것 같다.

그가 견뎌내야 했던 것들은 무엇일까? 견디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나, 우리에게 견뎌야 할 만큼 운명적인 사건이 얼마만큼 다가오고 있는가? 슬픔과 분노의 현장에서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슬픔에 상하지 않으면서 저항하고 있는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북핵과 사드 문제로 갈수록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서경식 교수가 던진 질문을 다시 한 번 반복한다. “한국은 어떤가?”

<편집자 주 : 이 글은 전북평화와인권연대 3.4월 소식지에 실린 글입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