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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얀마 문제를 바라보면서

김성순( icomn@icomn.net) 2021.05.24 09:50

이번 칼럼에서는 연일 터져 나오는 뉴스에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분노와 무력감을 안겨줬던 미얀마 사태를 주제로 하여 문제의 배경과 경과에 관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명쾌하게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 문제라도 그 원인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것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어느 곳에서라도 이와 유사한 일을 만나게 될 때, 우리 인간의 예지(叡智)가 지르는 무언의 경고음이 인류사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로힝자족에 대한 탄압과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 시민에 대한 폭력이라는 두 문제는 별개인 듯 보이지만, 그 기저에 미얀마의 ‘악의 축’인 군부의 문제가 동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사건에 공통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미얀마 군부의 문제에 대해 연속선상에서 얘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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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미얀마 민주화시위 ⓒ 미얀마 CDM)

군부 쿠데타와 그에 저항하는 시민에 대한 무차별 폭력으로 뉴스에 오르는 나라 미얀마는 수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군부의 폭력으로 인해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했었다. 바로 미얀마 내의 소수민족인 로힝자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한 사건이었다. 로힝자족은 지구상에 2백여만 명 정도가 존재하며, 그 중 미얀마 130만 명이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의 접경지역인 여카잉주 북부에 거주한다.

미얀마를 점령했던 영국은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다수인 버마족을 탄압하고 다른 소수민족들을 우대하는 분할정책을 실시했으며, 그 결과로 미얀마가 1948년 독립하였을 때 인종 간 갈등이 상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버마 독립군은 영국과 대항하기 위하여 일본을 지원하였으나, 로힝자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은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의도에서 영국을 지원했던 것도 이러한 갈등의 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는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자족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1962년 세워진 미얀마 군부는 로힝자족을 미얀마 원주민 출신의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군부는 로힝자족이 1948년 버마가 독립하기 전에 영국에 의해 거대한 투입된 이주노동자들이었는데, 독립 이후에 자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정착해버린 불법이주자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얀마 정부는 로힝자족을 미얀마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방글라데시에서 넘어온 불법의 이민자라는 의미가 포함된 ‘벵갈리(Bengali)’로 부를 정도였다. 이처럼 소수 민족인 로힝자족에 대한 미얀마 군부의 차별과 박해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고질적인 문제였으며, 우 틴쩌 문민정부(2016. 03­2018.02)시기에 미얀마의 종족 갈등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미얀마 군부가 로힝자족을 탄압하게 된 원인에는 지정학적 요인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이 이 지역에 항구를 개발해서 중동으로부터 수입하는 석유를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이 있는 반도를 우회하지 않고 바로 중국 대륙으로 수송하는 파이프 라인을 건설하려고 하는데, 로힝자족이 소수 민족으로 인정받으면 이 문제를 둘러싼 결정이나 이권에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미얀마 군부는 근본적으로 로힝자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1982년 시민권법을 개정하면서 1823년 이전부터 해당 지역에 거주하였음을 입증한 소수 민족에게만 국적을 부여해서 로힝자족은 영원히 시민권이 박탈된 무국적자로 생활하게 되었다. 또한 로힝자족의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여성은 자녀를 2명 이상 출산하지 못하게 했고 이를 어기면 10년 징역형에 처하는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한 긴장이 지속되던 중에, 여카잉주 남부지역에서 2012년 5월 28일 불교도 여성이 강간당하고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마침내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얀마 전역에 반무슬림 정서가 확산됐으며 불교 극우주의 세력들은 무슬림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부르게 되는 상황은 미얀마 로힝자족 문제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는데, 바로 2016년 10월에 ‘여카잉 로힝자 구원군(Arakan Rohingy Salvation Army)’이라는 무장단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미얀마 군부의 군사작전만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카잉 로힝자 구원군’도 힌두교도들에 대한 탄압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는 잔혹 행위를 했던 것이다. 내전이 악화된 1985년 이래 현재까지 종족 분쟁으로 최소 1만 6천 명이 사망했으며, 국내외 난민은 수십여만 명에 이른다.

이러한 로힝자족에 대한 탄압의 뉴스가 서서히 기억속에서 사라질 무렵 이번에는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 뉴스가 다시 떠올랐다. 미얀마 군부는 1962년에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에 2015년 선거에서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에 정권을 넘겨줄 때까지 53년간 미얀마를 장악해왔다. 미얀마 군부는 실권자가 다른 군인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형태로 권력을 유지해왔으며, 군대뿐만 아니라 미얀마의 정치, 경제, 행정을 비롯한 사회전반을 장악하고 통치해오면서 민주화세력과 소수민족을 탄압했다.

이전에도 미얀마 군부는 1988년에 일어났던 대규모 민주화 시위(8888 항쟁)때 실탄사격을 포함한 무차별 무력진압으로 인해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케 했던 전력이 있다. 2007년에 미얀마 불교 승려들이 앞장섰던 소위 “샤프란 항쟁”에 대해서도 미얀마 군부는 실탄사격을 포함한 무력진압을 자행했다.

1962년 우 누(Nu)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한 네 윈(NeWin)은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1인 독재체제 확립을 통하여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을 포함하는 모든 국가 권력을 독점하는 군부 집권체제를 구축했다. 1988년에 발발한 민주화 항쟁으로 네 윈이 사임한 이후 군부가 퇴진하고 국민 총선거에 바탕을 둔 민간 정부가 출범할 것으로 기대를 했지만, 다시 1988년 9월 소 마웅(Saw Maung)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2010년까지 군부 독재체제는 지속되었다.

사실 미얀마 군부는 아웅산 수치의 부친인 아웅산(Aung San) 장군이 일본의 도움을 얻어 1941년 창설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영국을 대신하여 미얀마를 지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이 인도로 퇴각한 후, 1942년 3월 일본은 미얀마를 점령했다. 이이에 아웅산 장군은 버마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에 저항했으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게 되자, 미얀마를 재점령한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미얀마의 독립을 쟁취했다. 따라서 아웅산 수치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아버지가 세운 군부의 후계자들이 자신을 가택연금하고, 국가고문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는 쿠데타를 벌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 군부는 국민의 저항이 있을 때마다 사회 혼란을 명분으로 진압해왔다. 군 지도자들은 국가의 발전보다 자신의 권력과 이익만을 추구했으며, 그 결과 1987년 미얀마는 유엔이 정한 세계최빈국(LDC)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016년 1월 말 아웅산 수치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군부는 쿠데타를 들먹이며 지속적으로 정부를 위협했다.

미얀마 군부는 2020년 11월 8일 총선에서 발생한 총 1,050만 건 이상의 선거부정을 정부가 방치했고, 이로 인해 국가의 분열이 우려되므로 헌법에 따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권을 접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군부를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정부의 입장이었으므로, 쿠데타는 사실상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민 아웅 흘라잉이 사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이번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 그가 원래 2021년 7월에 퇴임을 강요받을 것으로 관측되자, 군대를 동원하여 권력을 탈취했다는 것이다.

미얀마 군부가 담화를 발표한 다음날인 2월 9일에 시위대를 향해 고무탄을 포함한 총기 발포를 시작하였다. 국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마침내 2월 27일 시위에선 본격적으로 실탄 사격을 동원하여 20명이 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미얀마 국민의 저항은 시민불복종운동(CDM; Civil Disobedience Movement)으로도 표출되고 있다. 직접적인 거리 시위 외에도 직장에 출근하는 대신 총파업을 통해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켜 군부가 스스로 물러나게 하겠다는 방식으로도 저항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의료진이 가장 먼저 CDM을 시작하면서 1월 말부터 시작한 코로나19 백신 접종 무기한 중단된 상태이다. 소수이지만 군인과 경찰까지 CDM에 가담하고 있으며, 2021년 3월 5일을 기준으로 CDM에 참가한 공무원은 약 2만 4,000명에 달했다. 국민들은 가재도구를 시끄럽게 두드리거나, 빨간 리본을 달거나, 양초를 켜 그들의 저항의지 표출하고 있으며, 세 손가락 경례는 미얀마 민주주의의 또 다른 상징이 되고 있다.

군인들이 진압에 본격적으로 나서자 여성들은 ‘터메잉’(여성용 통치마)을 내걸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미얀마 불교의 ‘퐁’(phon)이라는 영혼의 개념이 전제되어 있다. 전생에 쌓은 업(業)의 정도에 따라 현세에서 퐁의 양이 결정되며, 남성이 여성의 속옷 아래를 지나가면 일시에 퐁이 떨어져 남성성 자체가 사라진다는 믿음을 겨냥한 시위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대규모 파업일을 지난 2월 22일로 정한 것도 숫자가 겹치면 영험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미얀마의 속신에서 나온 발상인데, 이는 8888항쟁 당시 독재자 네윈이 가장 싫어하는 숫자인 8이 겹치는 일시에 시위의 정점을 이루었던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이렇게 저항을 지속하고 있는 미얀마 국민은 군부의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유엔의 보호책임(R2P) 발동과 유엔군 개입을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지만, 이는 유엔 안보리 전원 합의를 거쳐야 하므로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지금도 군부는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있으며, 온라인을 통해 접하는 시위대의 피해 상황은 처참하다.

짧게는 2015년부터, 길게는 2011년부터 시작된 미얀마의 민주주의로의 여정이 과거의 무력진압과 군부독재유지로 귀결될 수 있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2015년 이전만 하더라도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국내외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로힝자족 학살에 대한 (소극적)옹호로 인하여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형성되었던 아웅산 수찌와 NLD에 대한 지지에 균열이 발생한 상황도 문제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얀마를 사실상 방치하면서 NLD정부는 중국과 적극 협력해왔으며, 로힝자족 문제로 인한 서구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미얀마 군부뿐만 아니라 아웅산 수치 역시 친중국의 노선을 걷고 있다. 실제로 2018년 11월 미얀마 정부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아웅산 수치를 위원장으로 하는 운영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로힝자 문제는 아웅산 수찌 집권 이전에도 NLD를 비롯한 민주세력들이 언급을 꺼려했지만, NLD집권 이후에 로힝자족 문제가 부상하자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을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책동으로 규정하는 자세를 보였다. 또한 아웅산 수치가 이번에 시민들의 저항에 힘입어 군부 쿠데타를 막아내고 권력에 복귀하더라도 그 이후가 문제일 수 있다. 1945년생인 수치의 나이를 감안해서 민주화운동세력의 후계자들을 정계에서 키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얀마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불교는 이번 쿠데타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

2021년 2월 1일에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의 군사령관 민아웅흘라잉(Min Aung Hlaing)은 하루 뒤 일부 참모와 함께 수도 네피도(Naypyidaw)에 있는 한 사찰을 방문하여 참배한 후 최근에 발생한 국가 혼란 사태를 수습하고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 국정을 책임지기로 했다고 큰스님에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불교계가 현 군부를 지지한다면 자연스레 국민의 동의와 지지도 따라올 것이라는 부수적 효과를 기대한 행동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부 지도자였던 초대 총리 우누(U Nu)는 재임 기간(1948-62)에 총 일곱 번이나 출가했고, 네윈과 그 뒤를 이은 딴쉐(Than Shwe, 재임 1992-2011) 등 다른 군부 인사들도 빈번하게 승려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친정부 성향의 승려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2007년 승려 중심의 반정부 시위인 ‘사프론 혁명’ 당시에 군부는 투쟁을 위해 거리로 나온 승려들을 가짜라고 규정했으며, 미얀마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찾아다니며 불교와 승려를 잘 모신다고 국민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그동안 이러한 군부의 ‘노력’이 통한 것일까? 이번의 쿠데타에 저항하는 시위에서는 2007년과는 달리 미얀마 승려들이 민주화를 위해 동행하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얘기가 오가지만, 아직 명쾌하게 분석한 내용은 없다.

세계시민의 입장에서, 현재 상황에서 미얀마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불교계의 침묵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결국은 이마저도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일 거라고 생각해본다.

다만 이제까지 미얀마 국민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었던 아웅산 수치와 불교계의 한계를 넘어서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달성하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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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순: 동국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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