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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덴마크 농촌마을에서 일어난 도그마적 사건 <더 헌트>

[새벽바다의 영화읽기] 덴마크 영화 <더 헌트>에 대해 말하고 싶은 세 가지

새벽바다 시골잡학덕후( jbchamsori@gmail.com) 2015.03.05 17:40

[편집자 주 - 이 글에는 영화 전반에 대한 줄거리와 주요 내용에 해당하는 정보가 있습니다. 독자들의 유의 부탁드립니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숲속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돈은 없지만 시간이 넉넉한 한량의 기분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면? 마실에 산책 나왔다가 그냥 스윽 마을회관에 들어가서 재밌게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이런 상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영화제가 있다. 그것도 우리 지역, 아주 가까운 곳에. 무주 산골 영화제다. 차비만 있으면 영화는 공짜다. 가족끼리 캠핑하면서 영화제를 즐길 수도, 돈 없는 학생들이 달랑 차비와 밥값만 들고 와서 마음껏 영화를 즐길 수도 있다. (올해는 6월 4일에서 8일에 열린다고 한다.)


느닷없이 영화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2013년 처음 열린 무주 산골 영화제에서 만났던 영화 <더 헌트> 때문이다. 무주처럼 숲이 많은 나라 덴마크 영화다. 2012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었고, 매즈 미켈슨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더 헌트>는 메시지가 중량감 있으면서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란한 솜씨로 재미를 잃지 않았던 수작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영화평론가들의 관심이 되었던 영화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루카스라는 유치원 교사는 아내와 이혼했지만 고향마을에서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의 자녀를 가르치며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친한 친구의 딸 클라라가 루카스의 성기를 자신에게 보여줬다는 거짓말로 일상은 파탄난다. 아이의 말을 중시하는 덴마크 사회에서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피해자로 생각되는 클라라는 철저하게 보호받는다. 하지만 피의자인 루카스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 성범죄자로 낙인찍히고 시선의 폭력과 애완견이 살해당하는 등의 물리적 폭력에도 시달린다. 당연히 절친한 친구와의 관계도 끝이 나게 되고, 더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애인도 떠나간다. 재판 과정에서 무죄가 인정되었음에도 마을 사람들의 시선의 폭력 속에서 루카스는 더 힘들어한다. 그런 루카스의 모습에 가책을 느낀 클라라가 진실을 말하게 되고 절친한 친구는 그의 무죄를 믿어주고 루카스는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1년이 지나 고향친구들과 사냥 모임에 참석한 루카스는 숲속에서 사냥감을 좇다가 누군가가 쏜 총탄으로 살해의 위협을 받으며 영화는 끝난다. 무죄가 밝혀졌지만 여전히 그는 성추행범으로 여겨지며, 사냥감이다.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만난 <더 헌트>에 대해 말하고 싶은 세 가지


이 영화를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도덕적으로 성숙해 보인다고 해서 꼭 성숙한 민주사회는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 첫째다. 클라라가 거짓말을 한 원인은 클라라의 오빠와 그 친구가 집에서 저지른 일상적 성추행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 두 번째다. 오빠도 가해자 중 한 사람이면서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지만 오빠는 클라라를 동정하면서 동생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점이 마지막 이유다.


덴마크는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를 넘고, 국가 예산의 3분의 1일이 복지예산인 북유럽의 복지국가다. 입헌군주국으로 정치적으로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인식이 아마도 일반적 생각일 것 같다. 작년 나의 베스트 영화 중 하나였던 <한공주>를 보고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들의 눈치를 보며 궁지로 내몰리는 어처구니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가슴 아팠다.


반면 <더 헌트>의 마을 사람들은 피해자로 생각되는 클라라의 말을 믿어주고 가해자로 생각되는 루카스로부터 격리시켜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이 얼마나 성숙해 보이는 모습인가! 이에 더해 유치원 아이들의 집단적 거짓말과 남성의 성기를 리얼하게 묘사하는 아이의 진술은 마을사람들에게 루카스의 유죄를 확신하게 한다.(클라라의 오빠의 친구가 태블릿 PC로 한 남성이 성기를 노출하는 사진을 아이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이를 토대로 진술한 것이다.)


재판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성추행범으로 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과 아이의 부모인 친한 친구의 시선은 그를 숨 막히게 한다. 심지어는 무죄가 선고된 후에도 그에게는 물건도 팔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재판이 진리를 결정하는 자리는 아니겠지만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로 취급하는 시선의 폭력이 존재하는 사회는 사이비 도덕이 합리적 의심을 억압하는 사회일 것이고 이는 절대 성숙한 민주사회가 아니다. 도덕이라는 올가미로 자유의 숨통을 조이는 것은 절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도덕적으로 성숙해 보이는 덴마크의 시골 사람들은 시선의 폭력을 행사하게 되었는가? 왜 무죄추정의 원칙을 어기게 되었는가? 그것은 아마도 도그마의 힘일지 모른다. 아이를 믿어주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라는 믿음. 피해자나 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은 선한 일이라는 믿음. 이런 믿음은 훌륭하지만 이 좋은 믿음이 스스로의 생각에 의해 반성되지 않고, 외부에서 주입된다면 그것이 도그마다.


좋은 믿음이라도 주입된다면?


도그마는 반성의 과정 없이 비슷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적용된다.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도그마는 습득과 적용이 모두 용이하다. (그러나 선의마저 없다면 생각 없이 편하게 살고 싶으나 생각 없다는 소리 들을까봐 둘러대는 핑계일 수도 있다.)


예전에 일했던 학교에서 아이들의 건강과 환경 미화를 위해 교내에서 컵라면 취식을 금지하자는 안건을 토의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컵라면을 먹을 자유가 있기에 나는 반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사들은 아이들의 건강을 위한다는 측면에서 좋은 일이라며 찬성했다. 결국 컵라면은 금지되었다. 회의 중 동료 교사들의 의견을 듣고서 나는 자유를 빙자해 아이들의 건강을 외면하는 자질이 부족한 교사인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왠지 동료들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동료들이 아이들의 건강을 위한다는 도그마대로 움직인 것은 아닌가? 진정 교사 자신의 생각으로 아이들의 건강을 위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힘들더라도 컵라면 먹는 일을 막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이 시대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이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좋지 않은 음식을 구별할 줄 알고 또 먹지 않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컵라면을 먹어서 자신의 건강은 좀 상하더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쓰레기 처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진짜 성숙한 민주시민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동료 교사들의 선의를 믿기에 나는 이것이 도그마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건강을 보호해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자유가 박탈되겠지만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추정했다.


이젠 클라라가 거짓말을 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 아이는 부모님이 일 때문에 늦게 데리러 와서 유치원에 혼자 남아 있었던 적도 있고, 오빠가 남자의 성기 사진을 보여주어 기분이 나빴던 일도 있어서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그때 가까이 살고 있고, 또 아빠의 친구이기도 한 루카스 선생님은 함께 있어 주고 말벗이 되어주기도 했다. 클라라는 루카스 선생님에게 키스를 하려하고, 하트 모양 편지로 사랑을 고백하지만 선생님은 관심과 이성적 사랑은 다른 것이라는 점을 가르치려고 한다. 이는 클라라의 사랑 고백에 대한 거절로 이해되고 클라라는 더 기분이 나빠져 선생님이 성기를 보여주었다는 거짓말로 그를 곤경에 빠뜨리게 된다.


이후 영화에서 아이는 공적인 영역에서 성폭력의 피해자로 보호 받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 오빠와 오빠의 친구가 저지른 일상적 성추행의 피해자라는 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거의 부각되지 않고 또 그 두 사람이 그 일로 벌을 받는 일도 없었다. 영화의 전개상 중요하지 않은 부분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일상적 성추행이 루카스가 성추행범으로 몰리는 사건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임에도 소홀히 다뤄지는 부분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또 대부분의 성범죄가 가정이나 직장과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자신보다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점을 상기하면 좀 더 신중하게 다뤘어야 하지 않을까?


가해를 인식 못하는 오빠, 이 시대 비리권력과 닮아


마지막으로 클라라의 오빠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친구가 클라라에게 남자의 성기 사진을 보여주는 성추행을 했는데도, 별다른 제지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범죄가 일어나는 현장에서 크게 제지하지 않으면 범죄를 방조한 것으로, 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빠 역시 가해자인데, 오히려 그는 피해자 가족으로서 동생을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신의 죄는 알지도 못한 채 죄인도 아닌 사람을 죄인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폭력에 동참하는 클라라의 오빠는 사실 우리 주변에도 많다.


전 중수부장 이인규 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 혐의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국정원의 조작이 있었다고 최근 발언한 일을 보자. 그의 말에 따르면 검찰이 아니라 국정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위해 거짓말했다고 한다. 그 거짓말을 알고 있었던 이 전 부장은 그 당시 방조했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고, 자살을 선택했다. 이 전 부장은 당시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했다.


자신의 죄를 알지도 못한 채 죄가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폭력의 가해자인 이 전 부장은 지금에 와서야 국정원을 지목하고 나섰다. 클라라의 오빠는 자신의 친구를 가해자로 지목하지 않았지만 이 전 부장은 국정원을 지목했으니 그나마 다행인건가? 클라라의 오빠가 자신의 죄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보이기 위해 친구를 비난한다면 욕먹을 일이다. 이 전 부장의 의중이 지금이라도 자신과 국정원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한 꼼수라면 비난을 면치 못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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