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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경석의 '25만원어치 노역 일기'

박경석( 1) 2014.04.11 22:34

화재 참사로 사망한 고 김주영 활동가 장례식 노제 도중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공동대표가 지난달 29일부터 4월 2일까지 서울구치소에 자진 수감된 바 있습니다. 박 상임공동대표의 4박 5일간 노역일기를 싣습니다_비마이너편집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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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9일 서울지방검찰청 앞에서 열린 자진노역 기자회견에서 박경석 대표 모습.
 
3월 29일 토요일
 
오후3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벌금 200만원 때문에 자진 노역한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나는 2012년 10월30일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집에서 홀로 잠을 자다 새벽에 발생한 화재로 질식사(10월26일)한 중증 장애여성 고 김주영 활동가의 노제를 지내면서 도로의 차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벌금 200만원을 받고 수배상태에 있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검찰에 출두했다. 검찰은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 1급인 나를 곧바로 서울구치소로 이동시키지 못했다. 나는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받기 위해 리프트 차량의 이용을 요구했고 검찰은 준비하지 못했다며 곤란해 했다.
 
검찰청 직원들은 서울시와 의왕시의 ‘장애인콜택시’에 전화했다. 모두 “이용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서울시 장애인콜택시는 서울구치소가 있는 의왕시까지 운행하지 않았고, 의왕시는 며칠 전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다고 했다. 검찰청 직원은 “이따위 정책이 어디 있어”라며 화를 냈다. 그는 “가까운 인접도시에 갈 때조차 이용하지 못한다면 무슨 장애인콜택시냐”며 소리 높였다. 검찰 직원조차 어이없어 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허탈했다. 장애인이동권 문제에 이토록 무관심한 사회를 향해 우리는 2001년부터 13년이나 외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검찰은 네 시간이 지나서야 나를 구치소로 옮길 수 있었다. 나를 마중하기 위해 따라온 활동가들을 뒤로하고 구치소의 두꺼운 담을 지나 홀로 철문 앞에 섰다. 혼자 가야하는 길은 참 외로웠다. 그러한 길이 어찌 구치소에 들어가는 길 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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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9일 박경석 대표를 태운 장애인콜택시가 서울구치소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구치소에 들어가자마자 신원을 확인했다. 긴 머리를 묶고 있던 머리끈을 포함해 모든 물건을 맡겼다. 벌거벗고 신체검사를 한 뒤 죄수복으로 갈아입었다. 비누와 칫솔, 수건 두 장이 담긴 비닐봉지를 받았다. 그리고 다른 비장애인과 달리 나는 오줌통 하나를 더 받았다.
 
토요일 밤 내가 간 곳은 독방이었다. 누워서 팔을 양쪽으로 뻗으면 완전히 펼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발을 뻗고 누우면 발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칸막이 없는 좌변기가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좁아터진 공간의 좌변기는 절대 이용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양쪽 벽면은 스펀지처럼 푹신한 것으로 덮여 있었다. 처음 수감된 사람의 경우 정신적 충격 때문에 자살할 위험이 있어 이런 방에 유치한다고 구치소 관계자는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2박3일을 송장처럼 누워만 있었다.
 
모포는 까는 것과 덮는 것 하나씩 주어졌다. 나는 척수장애라는 사실과 장애 상태를 교도관에게 다시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욕창 때문에 수술도 몇 차례 한 상황이라 누워있을 때 바닥에 모포 하나만 까는 것은 위험하니 침대나 매트리스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단 교도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세 겹으로 겹쳐 깐 모포 위에 휠체어와 분리된 채 들려서 눕혀졌다. 독방은 원천적으로 휠체어가 들어올 수 없는 구조였다. 내 휠체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밤새 꺼지지 않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눈만 깜빡여야 했다.
 
3월30일 일요일
 
새하얀 형광등 불빛의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다. 두 눈에 보이는 구치소 독방의 철문 구멍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아침을 먹지 않은 채로 교도관을 불러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정말이지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내 장애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했다. 괜한 동정을 받는다는 기분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나는 구치소에서 만나는 교도관마다 내 장애 상태를 반복 설명하면서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교도관님, 나는 소변 조절이 자유롭게 되지 않습니다. 잠자는 도중에 소변이 흘러넘쳐서 모포를 적실 수 있습니다. 모포가 젖지 않도록 조치가 필요해요. 흘러넘친 소변 때문에 몸을 씻어주어야 하는데 화장실에는 가기도 힘들고 내가 씻을 수도 없게 되어 있어요. 조치를 좀 취해주세요.”(노들장애인야학에서 이 사실을 알면 나를 ‘오줌싸개 교장샘’이라 할까 쑥스럽다)
 
하지만 교도관은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내일 의사 선생님 진단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앵무새처럼 답했다. 나는 다시 “의사 선생님의 진단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오늘 당직 책임자에게 지금 흘러넘친 소변을 처리하고 샤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라고 요구했다.
 
당직 교도관은 “여기가 당신 집인 줄 아냐”라고 고함쳤다. 그리고 “벌금 내면 되지 왜 벌금 안 내고 사람 귀찮게 하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머리가 핑 돌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참창 옥신각신했지만 나는 그저 장애를 핑계로 엄살떨고 있는 한 명의 ‘골통’으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모포는 소변에 푹 젖었고 그대로 누워있기 너무 힘들어 다시 한 번 요청했다. 잠시 후 조금 높은 사람이 왔다. 그는 문도 열지 않은 채 문구멍에 대고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가버렸다.
 
“사소한 것으로 꼬투리 잡아서 귀찮게 하지 마시오. 경고합니다!”
 
경고? 귀찮게 하면 지금보다 더 힘든 곳으로 보내겠다는 뜻인가? 더 힘든 곳은 어디지? 나는 그렇게 방치된 채 2박3일을 지내야 했다. 재소자에게도 인권은 있다. 그래? 개뿔이다. 인권은 무슨 인권.
 
그때부터 나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교도관들의 비웃음만 돌아왔다.
 
3월31일 월요일
 
날이 밝자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진정서를 작성해 접수했다. 교도관은 “지금 진정서를 쓴 수감자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어요. 인권위 직원이 나온다면 아마 당신의 40일 노역이 다 끝난 뒤일 것”이라며 기계적 말투로 접수했다. 이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막막했다.
 
아침에 면회 온 동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인권위에 긴급 진정을 요청했다. 동지들은 “오늘 저녁 노들야학 수업을 아예 구치소 앞에서 현장수업으로 진행한다”라고 전해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고마웠고 힘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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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왕에 있는 서울구치소 앞에서 열린 노들장애인야학의 수업. 
 
면회를 마치면 의무반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드디어 의사를 만났다. 내가 요구했던 모든 것은 의사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했기에 무소불위 권력자를 만난 셈이다. 그러나 그가 조치해 준 것은 여타 다른 구치소 방 환경과 똑같은 병동 구치소로의 이동뿐이었다. 여전히 나는 한 마리 짐승으로 방치되었다.
 
4월1일 화요일
 
아침에 인권위원회에서 긴급조사를 나왔다. 구치소 내부의 진정 절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외부 동지들의 긴급 진정이 받아들여져서다. 나는 인권위 조사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조사관들은 구치소 소장을 만나보겠다고 했고 내가 있는 방도 보고 갔다.
 
오후에는 구치소 소장을 면담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공식적인 사과와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다. 소장은 “사과 문제는 상대적인 것”이라며 “앞으로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얼버무렸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복역중인 방으로 옮겨졌고,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구치소에서 욕창 방지용 매트리스를 사다 깔아주었다. 몸도 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노역 없는 노역살이는 고통스러웠다. 휠체어 없이 누워만 있는 시간은 더할 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구치소 입감 첫날부터 노역 일거리를 요청했다. 봉투접기라도 시켜달라고 했으나 구치소 쪽은 일거리가 없다며 거절했다. 한 해 4만명이 단지 벌금낼 돈이 없어 노역형을 살고 있다. 하지만 실제 구치소에선 그들에게 시킬 노역 거리가 없어 사실상 징역형을 살게 하는 것이 한국 벌금 시스템의 웃지 못할 현실이다.
 
저녁에는 당뇨에 따른 저혈당 증세가 찾아왔다. 더 이상 단식을 이어가기가 버거웠다. 일요일 저녁부터 시작한 3일째 단식을 마무리했다.
 
4월2일 수요일
 
나는 시민들의 모금으로 5일만에 구치소를 나올 수 있었다. 5일간의 노역 대가인 25만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벌금을 납부했다.
 
나의 구치소 노역 소식을 듣고 126명이 ‘소셜펀치’(http://www.socialfunch.org/nofain) 모금과 계좌이체로 무려 1084만4533원을 벌금을 모아 주셨다. 우리는 이 돈으로 나를 포함해 김주영 노제 과정에서 18명에게 부과된 1535만 원 벌금 중 상당액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허재호 회장은 탈세와 횡령으로 부과받은 벌금 254억 원 중에서 5일간의 노역으로 25억 원을 탕감받았다. 나는 도로 차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부과받은 200만 원 벌금 중 5일 노역으로 25만 원을 탕감 받았다. 노역을 살면 살수록 탕감액 격차가 천문학적으로 벌어지는 구조이다. 그 구조의 핵심엔 야만스런 돈 냄새를 풀풀 풍기며 우리를 지배하는 ‘법질서’의 실체가 도사리고 있다. 노들야학이 3월31일 구치소 앞에서 현장수업을 할 때 야마가타 트윅스터라는 인디 뮤지션이 불러준 <저질 저질 돈만 아는 저질>이란 노래가 있다. 내 귀엔 사법부를 위한 찬송가로 들린다.
 
벌금의 불평등은 헌법 제11조 1항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헌법 위반이라고 아무리 외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구치소에 간 것은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현실과 제도 앞에서 너무 쉽게 ‘평등’을 포기한 채 살고 싶지 않아 세상을 향해 날리는 ‘똥침’이었다. 어떤 상황이 닥치고 어떤 곳에 있더라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싶지 않은 작은 저항의 ‘몸부림’이기도 했다.
 
구치소에서 고병권 선생님이 쓴 <살아가겠다>를 읽었다. 책에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전태일의 이야기가 나온다.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시장에 나가 등불을 들고 “인간을 찾노라”라고 한 것처럼, 나는 구치소에서 등불을 들고 “평등을 찾노라” 말하고 싶었다. 비록 혼자만의 ‘원맨쇼’로 치부될지라도.
 
장애인운동을 시작한 이래 법원은 내게 2001년부터 2012년까지 23차례의 벌금을 선고(2874만 원을 납부)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나를 비롯한 90명에게 6845만 원을 부과했다. 나를 구치소에서 꺼내준 시민들의 모금은 나를 포함해 장애인운동을 하다 벌금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연대’라고 생각한다. ‘나를 아는 모든 나’, 그리고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게 부치는 전태일의 유서처럼 ‘그대 영역의 일부’로서 장애인들을 받아들여주길 요청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평등과 연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지 않을까.
 
이제 4월 10일이면 또 재판이 시작된다. 김주영이 죽은 해(2012년) 12월2일 세계장애인의 날을 맞이하여 국회 정론관에서 1박2일 머물며 ‘높으신 의원님들’께 주영이의 죽음을 알리고 장애인활동보조 예산을 올려달라고 기자회견을 진행한 일 때문이다. 검찰은 공동주거침입 죄로 나와 2명의 장애인을 기소했다. 이미 3명의 장애인에게는 350만원의 벌금이 부과됐고 이 건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21> 1006호에도 실렸습니다.

(기사제휴=비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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