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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성전을 정화합시다!"

문정현( 1) 2011.04.05 14:03

[카톨릭뉴스 편집자 주]문정현신부는 지난해 8월 20일부터 명동성당에서 점점 커지고 힘이 세지는 교회와 우리 신앙인의 삶에 대해, 또 이웃 사랑과 생명 평화에 대해,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해 기도하고 성서를 묵상하고 계신다. 어두운 오늘을 밝히는 유일한 빛은 예수님의 복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3월 9일 재의 수요일부터 4월 20일까지 매주 월요일~금요일 오후 2시에 성당에서 십자가의 길을 신부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정화합시다."


모든 복음서가 이 사건을 전합니다. 성전을 사랑하시고 성전에서 기도하시던 그분이,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던 그분이 성전을 뒤엎으셨습니다.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음에 분노하셨습니다.


장사치들을 내쫒고 그들의 탁자와 의자를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분은 호통 치셨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다!”

 

명동성당에 사제들이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하느님의 생명 정신에 위배되는 4대강 사업을 멈추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천주교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는 것은 주교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이었습니다. 사제들은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소연하러 명동성당으로 갔습니다.

 

‘영업을 방해 말라.’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뜻하지 않은 솔직한 자기고백이었습니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개발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심각한 병입니다. 이 생각들이 다른 모든 가치를 하찮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스러운 존재들인 성전, 성직자, 성도들도 세속과 다르지 않게 꽤 중독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가 상업주의에 빠져 스스로 부자가 되고 권력자가 되었다고 우려합니다. 신자 수, 본당 수가 교회 성장의 기준입니다. 너도 나도 더 큰 교회, 도시 풍의 더 세련된 교회를 세우는 데 관심을 둡니다. 많은 교회에서 사목자들과 신자들이 빚 갚는데 온 신경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돈 없는 사람들은 소외와 이질감을 느낍니다. 하느님의 집이건만 평안과 소속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교회는 일상을 영적인 카리스마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어지럽고 현란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집, 기도하는 집으로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야 합니다. 혼탁한 일상에 영이 스미도록, 타락한 세속이 정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구약 예언자들이, 그리스도 시대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물질 만능주의, 개발 지상주의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해버렸습니다. 장사치들과 강도들에게 나약하게 굴복하고, 신앙심마저 암암리에 거래하며 슬금슬금 성전 자리마저 내준 교회 책임이 큽니다.

하느님 나라 일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나머지는 주어질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이 우선이고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주어질 것입니다. “걱정을 말라!”(마태 6,31)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5-26)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교회는 돈 걱정, 신자 수 걱정으로 가득합니다. 교회를 책임지는 지위에 있는 분들의 대화가 재정관리, 부동산 관리 얘기로 채워집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살 걱정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현실적이셨지만 한없이 낙천적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어둠을 다루셨지만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 없는 거리의 노숙자와도 같았지만 모든 걸 다 베풀고 모든 걸 다 나눠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부귀영화 중 오로지 하느님만을 택하고 섬기셨습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비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신자들이 그 비전을 바라보며 세상 속에서 증언하고 증거 하는 삶을 살게 해야 합니다. 그 비전이 바로 사회 비전, 사회정신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영으로 세속을 품고, 세속이 영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온 세상이 하느님의 집, 성전 안에 하나 될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하신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가 마침내 성취될 것입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대체되고 슬픔을 기쁨이 되게 하는 힘, 죽음이 생명이 되고, 빈 무덤이 모든 것이 되는 힘, 그리스도 수난과 죽음 속에 담긴 신비입니다. 그분께서는 고립된 개인들을 형제애와 공동체로 묶어주고, 억압과 착취의 정치를 연민과 정의의 정치로 변모시키며, 냉정하고 이기적인 관계를 사랑과 나눔의 관계로 만드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 수혜자이고 상속자입니다. 대리인이고 증거자입니다. 교회의 집단적 증거, 이것이 바로 사회참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움 없는 집단이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모든 차원의 삶을 예민하게 감지해야 합니다. 그 모든 걸 감당하겠다는 대담함과 용기로 도전, 결단, 투신하는 영성을 지녀야 합니다. 고상한 수사나 먼지 쌓인 문서를 넘어 신앙행위에 깊이와 질을 더해야 합니다. 예언직의 소명은 희미하고 사제직 왕직만 강조되는 현실을 통회해야 합니다. 전례와 교리는 예언직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언직 없는 전례와 교리는 그냥 형식이요 뼈대일 뿐입니다. 세상에 증언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겸손한 자기봉헌입니다. 많은 이들이 가기 싫어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곳, 그런 자리들이야말로 교회가 있을 곳이고, 그리스도인들이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자리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 사셨듯이 말입니다.

그 모든 시간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는 쉴 수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투스는 바로 우리 마음을 대변합니다.
“오, 주여. 당신 안에 쉬기까지 쉴 수가 없습니다.”

 

[기사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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