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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버스노동자, 오늘도 달린다

박광수( 1) 2011.03.23 12:48 추천:4

새벽 4시 자명종이 귓전을 때리며 단잠을 깨우면 행복한 시간은 일장춘몽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다시 버스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로서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무사 안전 운행을 기도하면서 회사에 나간다. 오늘은 또 무슨 말로 회유로 협박을 하며 사측이 우리를 괴롭힐까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고 주눅이 든다. 그들의 탄압을 뒤로하고 기점으로 가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첫 손님을 맞이한다. 그날의 기분은 첫 손님에 의해서 좌우될 때가 많다. 그런데 대부분 올라오시자마자 추워서 떨고 있는데 몇 분을 늦게 도착했네 하며 불평하기 일쑤다. 또 어떤 분은 고액권을 지불해서 나의 임기응변 능력을 시험하려 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다음 손님들을 기다렸다가 해결하곤 한다. 그러면서 손님들과 함께 하루의 인생 일기를 써나간다.

 

첫 차를 이용하는 손님들은 막노동을 하러 가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잠이 부족한 손님들이 졸다가 버스 바닥에 나뒹굴 뻔한 아찔한 순간들이 많다. 그렇게 한숨을 몰아쉬며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거의 모든 사고 책임을 근로자에게 전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어렵고 힘든 일을 감내하며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해 ‘운수를 멈춰 세상을 바꾸려’한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전주는 한때 6대 도시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많이 낙후되었는데 시골 마을을 운핼할 때가 많아서 재미있는 일도 일어난다. 생산한 농산물을 도시에 나와 팔기 위해 환갑도 넘은 할머니들이 자신보다 더 큰봇짐을 들고 탈 때가 많은데, 편의를 위해 뒷문을 개방해주면 끙끙대면서 가지고 올라오신다. 고맙다는 인사말을 뒤로하고 몇몇 정류장에 정차하다 보면 버스인지 화물차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우리가 아니면 그분들의 생계가 막막할 것이라는 생각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한번은 손님 한 분이 자그마한 보따리를 들고 올라오셨다. 그런데 몇 정거장을 가다가 벌어진 상황. 보따리가 풀어져 차 안 바닥이 온통 콩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비상사태였다. 만약 그 위를 손님들이 밟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차를 정차하기 전에 손님들께 고지하는 게 급선무였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하는 것처럼 “동작, 그만!”을 외쳤다. 외마디 외침에 손님들이 놀란 틈을 타 차를 정차시킨 뒤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운행하다 보면 웃을 때도 많다. 시내를 벗어나면 추가 요금 징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앞문으로 하차를 해야 한다. 시골에는 노인들이 많기 때문에 내리실 때 정감있는 인사를 건넬 때가 많다. “기사님, 수고했어요”하면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바빠서 멀리 못 나갑니다”하고 인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리시는 손님이나 안에 계시는 손님들께서 ‘하하하’ 웃는데, 그럴 때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신다.


요즘은 주 고객이 어르신들이다. 그러다 보니 자리 양보가 문제가 될 때가 많다. 어르신이 올라오셨는데도 양보를 하지 않고 먼 산만 바라보는 젊은이들이 얄밉기 그지없다. 그럴 때는 한마디를 공중파로 날린다. “할머니, 할아버지 자리가 없으신가요? 제가 자리를 양보할게요. 여기 앉으세요”하면서 자리를 양보하는 척하면 어김없이 자리 하나가 나온다. 어르신께서는 “기사 양반이 자릴 비우면 누가 운전을 하고 가”하면서 웃으신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배차 시간에 쫓기고 출퇴근 시간과 식사 시간을 확보하며 운행을 하다 보니 어르신들 모실 때 다소 소홀한 부분도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어르신들이 행선지를 물어보거나 망설이며 서성거릴 때 문을 닫고 가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터득한 어르신들의 버스 타기 작전 1호. 버스가 도착해 문을 열면 먼저 지팡이를 차 안에 던져 넣거나 버스에 무작정 올라탄다. 그렇게 시간을 확보한 후 행선지를 물어보신다. 노인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사업주들과 관계기관에서는 친절과 봉사를 외쳐대지만 버스노동자는 여전히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내몰린다. 그래서 이런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중이다.

 

▲[출처= 삶이 보이는 창]

 

버스노동자로 삶을 이어가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이제는 손님의 눈빛만 봐도 대충은 알아맞힌다. 돈 통에 현금을 넣을 때 10원짜리 하나만 부족해도 행동이 수상하다. 시선을 내게 돌리며 반응을 살피는가 하면 손을 뒤틀면서 뭔가 겸연쩍음을 표현한다. 그러고 보면 서민들은 항상 정직하다. 가끔 까다로운 손님을 대할 때면 내가 애 이 직업을 택했나 하고 자책할 때도 있지만 보람도 많이 느낀다.

 

가장 힘든 경우는 취객을 대할 때다. 얌전히 있다가 내리시면 별 문제 없겠지만 어쩌다 한 번쯤은 차내에 파전(구토)을 부쳐놓거나 시비를 걸기도 한다. 운전하랴 말동무 해주랴 안전 운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지만, 어디까지나 손님은 왕이다. 막차에 타서는 콜콜 자다가 시내에서 내리셔야 할 분이 시골 종점까지 와버릴 때도 있다. 행선지라도 말씀해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경우는 참으로 난감하다. 어쩌겠는가. 택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모셔다 드릴 때도 많다.

 

노랗게 물든 가로수 은행나무에도 단풍이 깊어가는 가을날에도 곤혹스러운 일이 있다. 손님을 태우기 위해 정류장에 차를 대면 은행잎과 은행이 함께 나뒹군다. 버스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은행잎은 날리지만 은행은 송객들의 발밑에 짓이겨져 고약한 냄새를 동반하며 차 안으로 들어온다. 어찌 이 냄새를 감당하랴. 킁킁. 어이쿠 머리야. 이 정도는 견딜 만하다. 하루는 한 어르신이 조그마한 비닐봉지를 들고 올라오셨다. 귀하신 은행을 한 봉지 주워가지고 오신 것이다. 차 안이 슬슬 구린내로 가득 찼다. 이 노릇을 어찌할꼬.

 

서민들의 발이 되어 이 길로 들어선지도 어언 14년째를 맞고 있다. 그리고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로 살기 위한 파업투쟁을 이어온 지도 벌써 세 달째 접어들었다. 민주노조의 깃발을 세워서 우리의 권리를 찾고자 하지만 이곳의 현실은 아직 너무도 참단하고 비참하다. 수수방관하는 관청과 언론들, 어느 하나 우리 편이 없다. 여기에 또한 어용들이 날뛰고 있으니 우리의 기본권조차도 확보하기가 힘겹다. 오로지 동지를 믿고 나를 믿을 뿐이다. 가족과 따뜻한 동지들의 힘으로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낼 것이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가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첫 월급을 받아 든 기쁨도 잠시, 통장의 잔고는 바닥나고 기약 없는 미래를 향해 달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남으로 태어나 연로하신 부모님 봉양을 소홀히 할 수 없었고, 여느 집처럼 아이들에게 미래를 꿈꾸게 해주고픈 부모로서의 의무도 다해야 했다. 입사 2년 후에는 부모님께서 지으시던 시골 논밭을 쉬는 날, 아내와 함께 경작하여 살림에 보태기로 했다. 그러나 만만찮은 여러 가지 제약들이 뒤따랐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작은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닐 때였으니 더더욱 그랬다.

 

경험 부족과 여러 여건상 논밭 경작을 그만두고 아내와 상의한 후 맞벌이를 했다. 박봉을 감당할 수 없어 사랑하는 아내를 상의한 후 맞벌이를 했다. 박봉을 감당할 수 없이 사랑하는 아내를 생활전선에 내보낸 나로서는 맘이 편치 않았다. 한창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한 부모의 심정 어찌 형언할 수 있으랴. 그래도 기특하게도 바르게 잘 자라주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박봉에 시달리긴 마찬가지다. 어용 노조와 사측의 밀월 관계로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3권은 오간 데 없다. 설상가상으로 두어 번의 대형 사고와 사측의 불합리한 사고 처리 등등. 지금도 아내와 맞벌이를 하지만 저축은 고사하고 옷 한 번 제대로 못 산다. 퇴근 후 팔과 어깨 통증을 호소할 때도 병원 치료가 아닌 ‘사랑해’란 말 한마디로 이겨낸다.

 

나는 진정 버스노동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파업투쟁의 승리를 기워난다. 시간과 열정,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시는 지인들과 함께하는 동지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타오르는 촛불처럼 희생과 사랑을 전한다.

 

[글쓴이] 14년째 버스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 전주 시내 버스 파업이 네 달째에 접어들지만 전주시, 언론, 사측 등은 모든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어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덧붙임]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 3.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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