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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산티아고순례길 30편_ 스페인하숙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로

장 회장님의 치유와 용서의 문

윤창영( ycy6529@hanmail.net) 2024.02.0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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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페라다는 철로만든 다리라는 뜻이다. 이 다리는 철골 구조물로 한가득이다.>

 

오늘은 예수부활대축일이다.

새벽에 짐을 꾸려 폰페라다를 출발했다.

오늘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까지 25km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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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세이로 데 푸엔테스누에바스다. 십자가 한면에는 예수님 메달려 계시며 다른 한쪽은 야고보상이 서 있다.>

 

크루세이로 데 푸엔테스누에바스(Cruceiro de Fuentesnuevas)에 도착했을 때다.

그동안 걸으면서 장종혁 회장님의 인생이야기는 많이 들었었다.

긴 시간 동안 함께 걸으면 옆 사람의 인생을 함께 나눌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어려움들이 있었는지.

살면서 고통스러웠던 순간들.

즐거웠던 시간들.

지금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과 행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등.

 

장 회장님은 많은 역경을 경험하셨던 분이시다.

어쩌면 그의 강한 정신력은 힘든 일들을 경험하면서 얻게 된 것이었다보다.

오늘은 회장님과 가족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이 가져오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가족이 서로에게 주는 상처를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다.

한참을 얘기하다 쉼터가 나왔다.

그 쉼터의 이름이 크루세이로 데 푸엔테스누에바스다.

 

“회장님? 회장님을 위한 노래가 생각났어요. 이 노래 한번 들어보실래요?”

“뭔데? 한번 들려줘 봐!”

 

나는 회장님께 ‘나 가진 재물 없으나(노래 한설희)’를 들려드렸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들었던 가스펠송 중 하나다.

서문교회에 다니는 동창생이 자주 들었던 노래라 나 역시 가스펠송을 많이 알고 있었다.

이 찬송곡은 송명희 시인의 시에 음을 입힌 것이다.

1963년생인 송명희씨 태어날 때부터 중증뇌성마비 환자였다.

어린시절, 머리는 스폰지처럼 만지면 푹푹 들어갔고, 등에 업힐때면 머리가 허리 아래로 휘어버리는 흐느적거리는 몸이었다고 한다. 항상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보니 죽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이었다는 고백이 있다.

그녀가 16살이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루는 성경을 읽는데 자신의 머리 위에 빛이 반짝이더란다. 감격해서 기도하는데 괴로움과 고통이 사라지고 기쁜 마음으로 변하면서 찬송을 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후 하나님을 찬양하는 뇌성마비 시인으로 등극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노래의 가사가 된 그 시는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찬송이라고 한다.

잘 쥐어지지 않는 토막 연필을 잡고 30분에서 1시간동안 한글자도 완성치 못하는 고통속에 울먹이며 썼던 시라고 고백했다.

너무 고통스러웠던 어느 날 ‘내가 말하는 방법 써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고백을 담은 제목의 시는 ‘나 같은 재물은 나’ 다.

고통속에서 완벽한 자신의 고백의 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 노래를 다 듣고 난 후 장 회장님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회장님의 눈을 보니 눈물이 고여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내신다.

“윤 국장? 이 노래! 내 노래네!”

이 짧은 한미디 말 속에 그동안의 회한이 생각나신것 같았다.

회장님이 지금 치유되고 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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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에 행렬을 환영하는 악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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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마리아 성당 옆문으로 예수님 성당이 입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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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앞에 모여 행렬을 준비하고 있는 마을 신자들>

 

목적지까지 가기 전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는데, 기억에 남는 마을은 카카벨로스(Cacabelos)다.

카카벨로스는 작은 마을이다보니 부활대축일 미사 행렬도 조촐하게 치러지고 있다.

성모마리아성당(Iglesia de nuestra senora de la Plaza)신자들이 모여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 성상이 입장하고, 그 뒤를 신자들이 따른다.

가는 길목에 관악대가 행렬을 맞아 연주를 울린다.

 

이 마을을 통과하면, 갑자기 길이 가파르다.

여기까지는 도로변 평지길을 계속 걷기 때문에 편하게 왔다.

‘그럼 그렇지! 역시 그냥 편하게 둘리 없어!’

목적지인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 가기 위해서는 오르막길을 걸어야 한다.

 

이날도 장 회장님을 앞서 보냈다.

회장님은 비야프랑카에 일찍 도착하셨다.

마을 입구 알베르게 앞에서 배낭을 등에 대고 한동안 누워계셨다고 한다.

내가 마을에 도착한 후 함께 쉬며, 오늘 머물 알베르게를 찾아봤다.

검색하면서 알게 된 것이 여기가 tvN 예능프로그램 스페인하숙의 촬영지란다.

산책할 때 촬영지도 둘러 봤는데, 한국어로 ‘들어오지 마시오’가 쓰여있다.

촬영장소는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의 ‘산 니톨라스 엘 레알 호텔(San Nicolas El Real)’ 뒤편 건물이다.

배우는 차승원과 유해진, 배정남으로, 이들이 순례자에게 숙박과 요리를 제공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스페인하숙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먹고 마시는 프로그램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사전에 알아 본 내용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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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니콜라스 엘 레알 호텔(San Nicolas el Real)과 오른편에 보이는 철문으로 들어가면 스페인 하숙을 촬영했던 알베르게가 나온다. 이 호텔은 직원들의 친절도는 높으나, 호텔 청결도는 최하점이다. 머물고 싶지만 머물기에는 부담스러운 장소 같다.>

 

우리는 숙소로 알베르게 레오(Albergue Leo)를 선택했다. 이 마을에서 평점이 최고였다.

부엔카미노 앱에 ‘최고의 숙소’라는 마크도 붙어있어, 고민할 필요 없이 이곳으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1명만 숙박이 가능하다고 한다.

알베르게 주인이 미안했는지 우리가 머물 알베르게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한다.

그곳 주인과 전화통화를 하더니, 알베르게 위치를 알려주셨다.

우리가 소개받은 숙소는 알베르게 데 라 피에드라(Albergue de la Piedra)다.

피에드라는 바위라는 뜻이다.

피에드라 알베르게의 특징은 절벽에 붙여 집을 지었다는 점이다.

내부에 바위가 그대로 드러나 자연과의 어울림이 환상적인 인테리어였다. 너무 신기하고 멋있었다.

이 알베르게는 3층으로 구성돼 있다.

1층은 응접실과 식당, 2층은 2인실 숙소, 3층은 함께 잠을 자는 창고같은 다인실이다.

장 회장님과 나는 3층 다인실로 들어갔다. 3층 시설도 훌륭하다.

이 알베르게는 깨끗함을 넘어 쾌적함이 넘쳐 흐른다.

3층 창문을 열어놓으니 발카르세강(Rio Valcarce)에서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들어오고, 높은 곳에서 보는 강의 모습까지 시각과 청각을 모두 기쁘게 해준다.

다만 샤워나 세탁은 2층에 내려와서 모두 해결해야 한다.

마을에 도착한 후 순례자의 일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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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드라 알베르게 내부 모습. 바위돌이 이렇게 이곳저곳 튀어나와 있다.>

 

그런데, 2층 2인실에서 한국분들이 나오셨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한국말은 어디에서 들어도 반갑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전주에서 왔어요.”

“그렇구나! 우리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이규석(65)씨로 장종혁 회장님과 같은 58년 개띠였다. 다른 한분은 김홍경(67)씨로 이 두분은 순례길에서 만나 함께 걷게 됐다고 한다.

이규석씨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에게 ‘아직도 담배를 피우냐’며 뭐라 하신다.

그 분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트레킹으로 오셨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걷고 싶은 길 버킷리스트였다.

재미난 말씀을 이어 가셨다.

자신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 이라고 생각한단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미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규석씨는 아직까지도 발에 물집이 안떨어졌다.

물집이 아물면 다른 자리에 다시 생겨 걷는 내내 물집으로 고통받으며 걷고 있었다.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미친 사람들의 순례길로 표현할까!’

장 회장님도 ‘맞다’ 며 맞장구를 쳐주신다.

그런데, 이 두 분의 ‘미친 사람들’ 이야기가 30분이 넘도록 계속됐다.

오랫동안 들으니 더 이상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귀에 거슬려 먼저 자리에서 피했다.

나중에 회장님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미친 사람들의 길로 몰아세운 것’은 무척 불쾌했다고 이야기를 따로 전했다.

‘미친 사람들의 길이면 왜 자꾸 걸어? 지금이라도 점프하시면 될텐데.’

이후 3일동안 계속 마주쳤다.

그 때마다 한국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도 미친 사람이야!’ 라는 표현을 하셨다.

제발 그분의 미쳤다는 말 속에는 좋은 의미가 담겨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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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성당과 용서의 문. 용서의 문은 길에서 바로 볼 수 있다.>

 

저녁이 돼 비야프랑카를 산책했다.

이곳에서 봐야 할 장소는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이다.

성당에 용서의문(Puerta del Pardon)이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지 못한 순례자라도 이 문을 통과하면 이곳에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1186년 아스토르가 주교가 교황의 칙서를 받은 때부터 시행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용서의 문은 ‘희년’에만 열린다. 산티아고대성당의 성문(거룩함의 문, Porta Santa)이 열리는 ‘희년’에 이곳 용서의 문도 함께 열린다.

단, 이곳에서 용서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순례자가 질병이나 신체적 문제점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하는 조건이 있다.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 도착한다.

순례길의 스승이자 동반자인 벨.

한참을 폰페라다에서 놀다가 버스로 이곳에 점프해온 최영화씨.

함께 부활성야미사를 드렸던 그레이타.

 

순례길은 함께 걷는 또 다른 예수님이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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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루니(Cluni) 수도원의 성당이다. 건축은 1070년에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16세기에 현재의 교회가 건축됐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을 혼합해 지었다가, 후에 후기 고딕 양식까지 더해졌다 한다.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의 혼합을 16세기 베르티아 건축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성당에는 세 개의 소성당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높은 제단이 있으며 신고전주의 양식이며 성모 승천을 기리는 것이란다. 바로크 로코코 양식의 코로석은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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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성당. 13세기에 만들어진 성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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