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가치 9장. 사라질 풍경 앞에서 나를 묻다
마운트 쿡과 푸카키 호수…단순한 빙하가 아닌 기후 위기의 경고
<아오리키 마운트 쿡 국립공원 모습>
오늘의 가치조각
▶ 자연은 과거의 선물이자, 미래의 책임이다.
▶ 진짜 여행은 나를 다시 마주보는 시간
<클레이 클리프 모습.>
오늘은 와나카를 떠나 마운트 쿡 국립공원을 향해 간다.
마운트 쿡은 뉴질랜드 남섬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마오리어로는 아로라키(Aoraki)-구름을 뚫은 산-로 불린다.
현지에서는 아오라키 마운트 쿡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곳은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가 훈련했던 곳이기도 하다.
마운트 쿡으로 가는 길은 오마라마를 거쳐 가야한다.
오마라마는 뉴질랜드 남섬의 매켄지 분지 남쪽 끝에 위치한 캔터베리 남부 와이타키 지구에 있는 마을이다.
매켄지 분지의 모습은 척박한 땅이였다. 마치 사막 속 모래 계곡을 지나는 것처럼.
이 지역을 통과할 때 차창 밖 풍경은 점점 낮설고도 거칠어졌다.
이 곳에 발을 들이자, 유대 광야 소금계곡이 연상되는 클레이 클리프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에 깎인 지형은 마치 다른 행성에 온 듯한 풍경이었다.
당초 일정이 없었던 장소였지만 나를 사로잡은 탓에 내일 여기를 올라보는 일정으로 급히 계획을 수정했다. 가끔 충동이 가장 좋은 일정을 만든다.
<마운트 쿡으로 향해 달리는 길에서 차를 멈추고 풍경을 담아 봤다.>
마운트 쿡을 향해 달리는 길.
어느덧 푸카키 호수에 다달았다.
푸카키 호수는 테카포, 오하우 호수와 함께 뉴질랜드 3대 빙하호수로 알려진 곳이다.
테카포와 함께 푸카키 호수는 외지인들에게는 오히려 맛좋은 연어가 생산되는 곳으로 더욱 유명하기도 하다.
푸카키 호수는 빙하수가 만든 에메랄드빛을 안고 있었다.
호수를 따라가는 이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 손색이 없었다.
전방에 마운트 쿡 국립공원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차를 갓길에 세우고 마운트 쿡을 바라보는 시간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이토록 웅장하고 단단한 자연이 인간의 시간 앞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자리에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트래킹의 장소인 후커밸리 트랙은 걷기에 아주 잘 정비된 길이다.
출렁다리 세 개를 지나며, 만년설이 깃든 마운트 쿡과 빙하 계곡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눈앞의 풍경은 거대했고, 차갑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곧 슬픔이 되었다.
빙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예전보다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풍경은 감탄의 대상에서 현실의 경고로 변했다.
EBS 여행 다큐에서 봤던 뉴질랜드 현지 노인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50년 전엔 산 아래까지 빙하였지. 지금은 많이 물러났어. 지구가 변하고 있는 걸 실감해."
그 말이 내 마음속을 오래 울렸다.
마치 지구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서글픔이 마음 깊이 울리고 있다.
그날의 산은 더 이상 환상적이지 않았다.
대신 현실을 품은 산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사라지는 것을 감상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앞의 빙하가 만든 물줄기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누리는 이 순간은 이전 세대의 자연이 만들어준 유산이지만, 다음 세대는 이 장면을 사진으로만 보게 될 가능성도 있다.
마운트 쿡은 그저 설산이 아니라, 기후위기의 현재형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거대한 경고장이었다.
<후커밸리 트랙을 지나며>
트래킹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푸카키 호수 전망대에 멈췄다.
빙하가 녹아 흐른 물이 모인 이 호수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물의 시작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눈앞의 아름다움이 무거운 책임처럼 느껴졌다.
에메랄드빛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었다. 그건 사라지고 있는 것들의 마지막 빛이었다.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인간은 너무 늦게 반응해왔다.
스스로 만들어낸 편리함에 길들여진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후커밸리 트랙에서 내가 본 것은 단순한 설산과 빙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시간, 그리고 우리의 선택이 남긴 흔적이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거대한 자연이 아니라, 그 자연을 마주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다.
그리고 가장 오래 남는 풍경은,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서 있었는가이다.
진짜 여행은 풍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연습이다.
어쩌면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새로운 장소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 익숙했던 자기 자신을 낯선 환경 속에서 다시 만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자연은 과거의 기억을 안고 있었고, 나의 걸음은 미래를 향한 물음이었다.
그 물음이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물음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아직 인간답게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