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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

[서평]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김경민( icomn@icomn.net) 2021.04.1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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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기린 한 마리가 계속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 그곳에는 새끼 기린 한 마리가 죽은 채 누워있다.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기린은 죽은 새끼의 어미. 그런데 마침 근처에서 치타 무리가 새끼 사슴을 산 채로 잡았다. 치타 무리는 어린 사슴을 죽이려고 한다. 그걸 본 기린은 치타 무리에게 다가간다. 아니, 그 긴 다리로 전 속력을 향해 달린다. 초식 동물이지만 몸집이 크고 달려오는 기세가 만만치 않아선지 치타 무리는 도망간다. 새끼 사슴은 일어나 제 어미에게 돌아간다. 기린은 제 새끼도 아니며 심지어 동족(?)도 아닌 생명을 지키기 위해 육식 동물에게 맞선 것이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보게 된 동물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이걸 정확히 언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반면에 언제 봤는지가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다음과 같은 장면도 있다.

 

2014년 7월의 어느 날,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뉴스를 클릭하다가 그 뉴스 안에 들어있는 짤막한 동영상을 보고 말았다. 굳이 ‘보고 말았다’고 말하는 까닭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뉘앙스와 그 동영상을 터치한 게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실수에 가까움을 말하고 싶어서다. 사실 나는 그 무렵, 텍스트로 된 기사들은 대충이라도 읽고 있었으나 영상으로 내보내는 뉴스나 사진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9년 만에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내가 임신 사실을 안지 열흘 후 즈음에 일어났다. 그 동영상 역시 세월호와 관련한 것이었다. 아줌마라고 하기에는 나이 들어 보이고 할머니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활기 왕성해 보이는 여성들이 단체로 빨간 옷을 맞춰 입고는, 단식 중인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앞에서 진상 규명 요구를 당장 중단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여성은 그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누가 놀러가서 죽으라고 했냐?’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이 내걸고 있는 단체의 이름은 무려 ‘엄마부대봉사단’이라고 했다.

 

갑자기 손이 떨리면서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당시는 입덧도 가라앉아서 식욕이 돌 때였는데 그걸 보고는 점심에 먹은 칼국수를 변기에 모조리 게워냈다. 엄마라…. 사랑이니 정의니 진실이니 하는 수많은 거룩한 단어들도 그것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입을 거쳐 이미 오래 전에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는 급기야 ‘엄마’까지 등장한 것이다. 스스로를 ‘엄마’라고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식을 잃은 엄마들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단식 중인 엄마들이 잃어버린 자식들은 겨우 열일곱 살, 열여덟 살이었다. 그 아이들이 탄 배는 무슨 타이타닉마냥 대서양 한복판 같은 데서 폭풍우와 암초를 만나 침몰한 게 아니었다. 사고는 화창한 날 아침에 이 나라의 영해에서 일어났다. 그 아이들은 불법 밀항선이 아니라 이 나라 정부기관에서 안전 점검을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먼저 전해 듣고 시신을 확인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서서히 침몰하는 배에서 수장되는 광경을 오랜 시간 동안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은 자신들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인터넷 기사를 휴대폰으로 보면서, 구조해달라는 요청을 자신들의 트위터에 남기면서 죽어갔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만일 내 새끼가 그렇게 죽는다면 나는 단식 같은 걸 하지는 않을 것이다. 폭탄을 만들지.

 

20세기 최고의 예술문화비평가로 추앙받는 미국 여성 작가 수전 손택은 그녀의 저서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에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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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 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 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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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은 냉정하게 말한다.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매번 놀라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사람이라면 그렇게 무지하고 천박해질 권리가 없다고.

엄마부대봉사단들은 악마일까? 그들은 악마가 아니다. 어쩌면 내 앞집에 사는 이웃일 지도 모르지. 그들은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내,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주는 엄마, 야무지게 살림을 하는 주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의 아이에게 예쁘다고 말해주는 친절한 이웃일 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이 없을 뿐이다. (아, 그로부터 3년 후에 그들이 깊게 공감하는 타인이 한 명 있기는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타인은 탄핵된 전임 대통령.) 수전 손택은 이 진실을 모르거나 모른 척하는 태도를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이라고 일갈한다.

나로서는 이 글을 읽고 뜨끔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새삼 놀라기나 했을 뿐, 난 무엇을 했단 말인가. 기껏해야 희생된 이들과 유가족을 ‘연민’했을 뿐. 수전 손택은 위의 책에서 이 ‘연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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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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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해 중요한 건 연민이 아니라 어떤 행동이라는 것. 살면서 새삼 절실하게 느끼는 건 세상 일 중 가장 쉬운 두 가지가 바로 ‘주둥이로만 떠들기’와 ‘돈 쓰기’라는 거다. 오직 행동이 귀하고 어려울 뿐. 지금 내가 이 글을 올리고 있는 시점에서 사흘 전, 이 나라 수도의 행정을 총괄할 수장으로 ‘용산 참사는 임차인들의 폭력적 저항이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선출되었다. 그 발언을 기사에서 접한 후 7년 전 여름처럼 속이 울렁거렸으나 이 선거 결과에 나 따위가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애초에 이번 선거를 왜 하게 되었나를 생각해보면 설사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다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지옥 속에서 살다보면 그곳이 지옥인 줄 모르게 된다는 걸 새삼 확인했을 뿐이다.

나는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겠다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다만 지옥이 지옥임을 잊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욕망 앞에서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명분이나 이성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능력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명색이 호모 사피엔스로 태어났는데 기린보다 못해서는 안 되겠기에. 참고로 수전 손택이 1996년에 보르헤스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독서를 일종의 도피로 생각할 뿐입니다. ‘현실’의 일상적 세계에서 탈피해 상상의 세계, 책들의 세계로 도망가는 출구라고요. 책들은 단연 그 이상입니다. 온전히 인간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수전 손택의 말》 (마음산책, 2015, p.19)

 

 

<추신>

 

지난 1년간 과분한 지면을 받아 서평을 연재했고, 이 글이 마지막이다. 수전 손택의 책을 마지막 텍스트로 선정한 이유는 그녀가 대학 시절 나의 롤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뇌와 용기와 끈기 모든 것이 그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사람이기에 그녀처럼 될 수 없었지만 지금도 그녀는 내 마음 속 우상이다.

한 가지 더 첨언하면, 연재를 마치면서 지난 1년간 선정한 텍스트를 일별해 보았는데, 세어보니 남성 작가의 책이 4권이고, 여성 작가의 책이 8권이다. 여성 작가의 책이 두 배 많지만 나는 이것이 균형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이 -100일 때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0이 아니라 +100에 서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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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교사를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며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를 비롯해 네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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