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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토끼는 언제든지 이기니까요

관리자( icomn@icomn.net) 2021.07.26 15:43

아주 유명한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 동화답게 이 이야기는 알뜰한 교훈을 남긴다. 남을 얕보고 무시하면 큰코다치고, 부지런히 자기 일에 열중하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 교훈을 극대화하기 위한 의인화와 비유가 재밌는 우화다. 그런데 이런저런 동화적 장치들을 제거하고 나면, 이 이야기는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경주를 먼저 제안한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사실 누가 경쟁을 주도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 경쟁이 과연 공정한 경쟁이었는지, 그 결과는 정녕 교훈적인 것인지를 좀 삐딱하게 들여다보자.

육상에서 토끼와 거북이의 주력은 비교가 불가능하다. 종류별로 다르겠지만, 거북이는 분당 25m 내외의 최고속도를 보인다고 한다. 시간당 1.5km 남짓이다. 2014년 ‘거북이 달리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기록된 공식 최고속도는 시속 990m였다. 반면 토끼는 시속 75km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다. 케이프 멧토끼라는 종류의 토끼는 최고 시속 80km로 달린다고 한다. 토끼와 거북은 육상에서의 이동속도로 한정하자면 게임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수영실력은 어떨까? 바다거북은 평균 유영속도가 시속 20km 정도 되고, 순간 최고 시속은 32km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토끼는 어떨까? 의외일지 모르지만, 토끼 종류는 제법 수영을 잘한다. 흔히 ‘개헤엄’이라고 하는 유형의 영법과 유사한데, 네 발을 동동거리면서 웬만한 물은 잘 건너 다닌다. 하지만 속도를 따지기에는 영 모자라다. 거북이와 누가 더 빠르냐를 비교할 차원이 아니다.

그럼 왜 하필 토끼와 거북이는 육상에서 달리기로 승부를 지으려 했을까? 거북이에게 유리한 수영으로 경쟁을 할 생각은 없었을까? 똑같은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하여 그 기회가 평등했다고 할 수 있는가?

토끼는 달리다가 방심한다. 잠시 쉬었다 갈 요량으로 드러누웠다가 내처 잠이 들었다. 거북이는 토끼를 따라잡았고, 잠들어 있는 토끼 곁을 지나갔다. 잠들어 있는 토끼를 깨우지 않고 지나쳤다. 토끼는 거북이가 지나가는 것조차 몰랐다. 경주가 벌어진 장소는 다행히도 토끼의 포식자가 없었거나 상당히 희소한 지역이었을지 모르겠다. 토끼는 경주에 지긴 했지만, 경계를 늦춘 탓에 포식자에게 잡아 먹히는 불운을 겪지는 않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상에서 거북이의 속도가 느리다는 건 그만큼 포식자들에게 붙잡힐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끼는 거북이의 이러한 사정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 경주의 과정에서 선수들 모두는 똑같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둘 다 같은 위험에 빠져 있었다고 해서, 과연 이 경쟁의 과정은 공정했다고 할 수 있을까?

결승선의 테이프를 먼저 끊은 건 거북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한 자는 승리할 것이며, 느리더라도 꾸준하면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결과는 얼핏 정의로워 보인다. 하지만 성실 근면함만으로 경쟁에서 승리를 거머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중간에 토끼가 잠이 들거나, 비탈길에서 갑자기 중심을 잃은 거북이가 등딱지 안으로 머리와 사지를 집어넣고 가속을 받으며 굴러 내려오는 일이 없다면 말이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달리기”라는 규칙만 성립하면 이제 경쟁은 전적으로 개인들 간의 문제로 국한된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시장주의에서 강조하는 ‘사적 자치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야경국가가 최선의 국가이며, 시장만이 진리의 구현체라고 강변한다. 이 구조에서, 거북이가 토끼에게 이기는 역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거북이의 승리는 우연이거나 기적이었다. 그렇다면 이 경주의 결과는 정의로운 것이었는가?

2019년 개봉된 영화 더 헌트(The Hunt)에서, 주인공인 크리스탈(베티 길핀 분)은 이 우화를 비틀어버린다. “거북이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며 새끼 거북이들에게 말했죠. ‘절대 포기하지 마라, 계속 기어서 전진해나가면 뭐든지 이겨낼 수 있다’. 이때 현관문에서 토끼가 나타났어요. 망치를 들고 거북이가 보는 앞에서 아내와 새끼들을 먼저 박살 내고 거북이도 죽였죠. 온 가족을 박살 낸 후 토끼는 거북이의 저녁을 먹었죠. 마지막 한 입까지. 왜냐면 토끼는 언제든지 이기니까요.”

오늘날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 ‘meritocracy’는 성적주의 또는 업적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어쩌다보니 능력주의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듯하다. 어쨌거나, 이 meritocracy는 특히 ‘공정’ 담론을 상징하는 말이 되고 있다.

‘공정’ 담론의 ‘능력주의’는 계층 간 갈등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 동계올림픽 남북 공동 선수단 구성,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각종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공정’ 담론과 능력주의가 구설에 올랐다. 누구는 힘들게 시험 쳐서 겨우 이 자리에 올라왔는데, 누구는 시험도 치지 않고 어영부영 언저리에 있다가, 이제 와서 시험 쳐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과 똑같은 대접을 해달라는 것이 공정한가라는 불만이 제기된다. 특히 이러한 불만은 공무원 시험 등 각종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청년들로부터 강하게 불거지고 있다. 공정담론과 능력주의문제가 세대 간 갈등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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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 책표지)

경기장의 조건을 바꿔 보려는 시도는 번번히 무산된다. 토끼의 입장에선 이 사태를 용납할 수가 없다. 토끼들은 이것마저도 공정이 아니라 분노한다. 왜 이렇게 뛰어난 우리가 져야 하는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우리가 왜 저들과 똑같은 위치에 머물러야 하는가? 분노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하지만 토끼들은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배경에 대해 함구한다.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긴 다리와 강력한 근육, 태어날 때부터 삶 그 자체가 되어 있는 달리기 훈련, 자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지형지물의 숙지 등등, 거북이는 아예 가질 수 없었던 토끼의 기득권은 ‘똑같은 출발선’이라는 허구적 기회의 평등 뒤에 감춰졌다. 그저 중간에 아무런 위력적 개입이 없었으며, 근면 성실한 거북이가 승리했다는 교훈을 알리바이 삼아 개인에게 온통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시스템은 과정의 공정성과 결과의 정의로움으로 체면을 유지한다.

자신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시험공부를 할 수 있는 배경과 근거는 공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 시험공부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건 그저 남의 사정일 뿐이다. 중요한 건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것. 필요하면 ‘같은’ 출발선에 서면 되는 거다. 그리고 달려야 하는 거다. 물론 이런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은 끝내 토끼가 이긴다는 정의로운 결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토끼는 언제든지 이겨야 하니까.

우리는 언젠가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감동적인 문장을 접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문장은 우리가 경쟁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그 경쟁구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진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경쟁구조를 피할 수 없다.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아니 너희는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토끼와 거북이일 뿐이다. 저 문장은 이것을 직시하라는 경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경쟁을 강조하는 저들은 경쟁의 바깥에 있다. 이미 자신들은 경쟁구조를 넘어선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쟁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들은 결코 다시 이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들은 들어오지 않으면서, 그 안에 남은 자들이 쓰러질 때까지 경쟁하도록 만들 뿐이다. 그리고 그 경쟁의 끝에서, 토끼는 언제든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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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식

한국미래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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