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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대 문헌에서 보는 국가적 위기와 주술

김성순( icomn@icomn.net) 2021.08.16 13:12

  이제 네 자리 수를 기록하는 코로나 일일 감염자수를 바라보며, ‘주술’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종교사회학자인 뒤르켐(E. Durkheim)은 그의 저서 The Elementary Forms of Religious Life에서 주술도 종교처럼 신앙과 의식으로 구성되며, 마찬가지로 자체의 신화와 교의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이 좀 더 초보적인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아직 종교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그러나 엄연히 종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주술은 아직 결사체 단계에 있는 종교집단이 교단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치병(治病)의 능력을 강조하는 그 무수한 교주들을 떠올려보라!

  특히 주술은 권력을 가진(혹은 가지려고 하는) 집단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민심을 모으거나, 통제하는 과정에서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와 같은 한국의 고대 역사문헌에도 주술과 관련된 기록들은 대부분이 전쟁 등의 국가적인 위기상황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에서의 전쟁은 대부분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간의 전쟁이며, 외부로부터의 침략인 경우는 중국(수·당)과 일본의 해적들이 침입한 사례들이 많다.

  이들 주술 중에 가장 인상 깊게 등장하는 것이 만트라나, 다라니, 부적 등을 이용한 주술, 즉 밀교의 주법이다. 일반적으로 신구의(身口意) 삼밀(三密) 행법으로 이루어지는 밀교의 주법(呪法)은 불력에 의한 가피를 호소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밀교 의식 집행자가 불타를 사념(思念)하고, 다라니 등의 주문을 외고, 손으로 인계(印契)를 맺는 행위는 불보살의 위력을 현실의 위난을 벗어나고 인간들을 구제하는 상징적 기능을 하게 된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편 ‘문무왕 법민’조에서도 밀교의 주법을 이용하여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신라 승려였던 명랑(明朗)은 문무왕 8년(668)에 당군이 신라를 치려고 할 때 왕에게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어 도량을 열면 적을 방어할 수 있다고 건의했으나, 이미 적이 국경에 다다랐다는 급보를 받고 유가(瑜伽)의 명승 12명을 불러 함께 문두루(文豆婁) 비법으로 태풍을 일으켜 당나라 병선을 침몰시켰다고 한다. 후에 당나라 병사 5만이 다시 침략했을 때도 다시 이 방법으로 침몰시켜 이때부터 진언종(眞言宗)의 별파인 신인종(神印宗)의 조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명랑이 행한 ‘문두루 비법’이라는 것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삼국유사』의 해당 구절을 보면 “채색 비단으로 절을 꾸미고 풀로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맡은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珈)에 밝은 스님 12명이 명랑을 우두머리로 삼아” 행했던 비밀스러운 의식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문두루비법의 결과로,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아직 싸움을 하지도 않았는데 바람과 파도가 사납게 일어 당나라 배들이 모두 침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671년에도 당의 조헌(趙憲)이 또 다시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자, 다시 그 비법을 사용하여 예전처럼 배를 모두 침몰시켰다고 전한다.

  인용문에 따르면, 명랑이 행한 ‘문두루 비법’은 채색 비단으로 사찰을 상징하는 결계를 하고 풀로 오방신(혹은 오방불)을 만들어 가지(加持)를 하는 일종의 밀교 작법(作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적 기록만을 놓고 보면 671년에 당군이 해로로 침입했다가 침몰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당문보유(全唐文補遺)』 제5輯에 수록된 ‘곽지해(郭志該)’라는 인물의 묘지명을 보면 그가 계림도판관(鷄林道判官) 겸 지자영총관(知子營總管)으로 임명되었고, 압운사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풍랑으로 인해 배가 부서져 익사하였다고 한다. 671년 설인귀가 계림도행군총관(鷄林道行軍總管)으로 신라에 침입했을 당시 판관으로 함께 왔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적 맥락을 살펴보면 한국 서해안의 바다 사정에 약한 누선(樓船)을 주력선으로 하고 있던 당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신라가 당군의 침입을 전후로 하여 문두루 비법을 실시함으로써 외견상 불력의 보호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겨냥했을 것으로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가야 김수로왕의 황비인 허황옥(許黃玉)이 타고 온 배에 함께 실려 있었다는 파사(婆娑)석탑과 관련된 시도 전한다.

 

석탑 실은 붉은 돛 배 깃발도 가벼워

사나운 파도 막아 달라 신령께 빌었다네.

어찌 황옥만을 도와 이 해안에 왔겠는가.

천고토록 왜적의 침략 막고자 해서라네.

 

  인용문에서는 허황옥과 함께 온 석탑이 단지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불력을 빌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의미도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석탑이나, 밀교의식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에는 향가(鄕歌)를 짓고 부르는 행위 역시 주술적 힘을 발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현재 전하는 향가는 총 25편인데, 양주동(梁柱東)은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14수(首)를 작자별로 내용을 분석한 후에, 현존 작품으로 보면 불교적 요소가 지배적임을 밝혔다. 이는 향가의 저자 대부분이 불교도나 화랑(낭도 포함)이라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진평왕(眞平王)대의 낭도인 융천사가 지은 <혜성가>는 불길한 혜성을 물리치기 위해 향가를 지어 부르자, 일본의 해병까지 물러갔다는 내용을 읊고 있다. 이 설화에서는 향가에 실린 발원의 힘, 즉 원력(願力)이 침입한 왜병까지 물러가게 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불력의 발원을 실은 향가는 주력(呪力)을 담지하고 있는 일종의 주가(呪歌)로 볼 수 있다.

  위의 사례들은 결국 전쟁 상황에서 문두루 비법이나, 석탑, 향가 등의 다양한 방편을 통해 불력에 의한 가호를 얻어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이른바, 불교적 주술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못지 않게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신적(神的)’ 주술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적’ 주술은 무격(巫覡)이나 도사(道士) 등에 의해 행해진 주술뿐만이 아니라, 특정 사물의 주력(呪力)이나, 의식(儀式)을 통해 주술적 효과를 이끌어냄으로써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특정 사물이나 의식을 이용하여 환술(幻術)과 유사한 효과를 얻어내는 주술을 행하는 주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신적 존재일 수도 있다.

  『삼국사기』 [儒禮尼師今]조에는 유례왕(儒禮王;284-298 재위) 14년(297) 정월에 이서고국(伊西古國; 현 청도)이 금성으로 쳐들어오자, 갑자기 수많은 군사들이 머리에 대나무 잎을 꽂고 몰려와 아군과 함께 적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그 후 대나무잎 수만 개가 죽장릉(竹長陵; 味鄒王陵)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선왕이 음병(陰兵)을 내어 싸움을 도운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 속의 주술은 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잦은 전쟁 때문에 불안한 국민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했으리라 생각된다.

『삼국사기』 권제14 고구려본기 [大武神王]조에는 왕자 호동(好童)이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의 딸인 아내를 시켜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낙랑의 보물인 북과 나팔을 훼손한 설화도 등장한다. 이에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했고,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않았던 최리는 그 사실을 알고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는 것이다.

  그 외 태종 8년(661) 5월 9일,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의 생해(生偕)장군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驢州 梧浦)으로 쳐들어오자, 성주 대사 동타천(冬陀川)은 온갖 노력을 다해 방어하려 했으나, 끝내 패하기 직전에 이르게 된다. 그가 마지막 방법으로 지성으로 하늘에 축원을 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큰 별이 적진으로 떨어지고, 우레가 울리고, 비가 쏟아지며 벼락이 떨어져 적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포위를 풀고 돌아가 버렸다는 기록도 전한다.

  김유신과 관련된 기록에도 위와 유사한 설화가 전한다. 고구려와 말갈 두 나라의 군사들이 한산성(漢山城)을 포위하여 신라군이 갇히게 되자, 김유신이 나서서 사태가 위급하니 오직 신의 술법으로만 구제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성부산(星浮山)에 단을 쌓고 신술을 닦았다. 그러자 갑자기 큰 항아리만한 불빛이 단 위에서부터 나타나더니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가 적의 포 30여개를 부숴버리면서 마침내 신라군이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위의 사례들에서는 특정 사물이나,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이 신의 가호를 받고 있음을 내외부에 알리는 동시에 내부 구성원들의 의지를 고양시키고, 전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내는 효과를 이끌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를 통해 신의 가호가 베풀어지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술인 것이다. 결국 주술이라는 것은 신적인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일종의 ‘조작(造作)’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불력이나, 신력(神力)이 아닌, 인간의 위계로 주술적 효과를 발휘했던 몇 가지 사례들도 눈에 띈다.

  남해왕(南解王; 4-24 재위) 11년에 왜인들이 병선 100여 척을 끌고 침입하여 민가를 약탈하므로 왕은 6부의 군사로 이를 막았다. 이때 낙랑에서 신라의 국내 방비가 약해졌으리라 짐작하여 금성(金城)을 공격했던 까닭에 상황이 몹시 위급하게 되었다. 그런데 밤에 유성이 낙랑의 병영으로 떨어지면서 이에 놀란 낙랑군이 알천 상류로 물러나 돌무더기[石堆] 스무 개를 쌓아놓고 도망하였다. 이때 6부의 군사 1천 명은 적을 추격하여 토함산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렀으나 돌무더기를 보고 아직 적들이 무리를 지어 진을 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추격하지 않았다. 이는 낙랑군이 석퇴를 쌓아 신라군의 눈을 속임으로써 퇴각할 시간을 확보하는 효과를 얻었던 사례라 할 것이다.

  내물왕(奈勿王;356-402 재위) 9년(364) 4월에 왜병이 크게 침입하자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혀서 사람처럼 보이게 한 후 각각 병기를 들려 토함산 밑에 세우고 용사 1천 명을 부현(釜峴; 현 경주 부근) 동원(東原)에 복병을 시켰다. 왜병들이 자신들의 숫자가 많은 것만을 믿고 그대로 진격하여 오자 급히 복병의 습격을 받고 대패하여 도망하였다고 한다. 이는 전쟁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허상을 세워두고, 실제 병력을 숨겨서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었던 사례라 하겠다.

  『삼국유사』 ‘지철로왕(智哲老王)’조에는 신라가 울릉도를 복속시키기 위해 위계를 사용했던 내용이 전한다.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 강릉)] 동쪽 바다에 우릉도(于陵島)[우릉(羽陵, 울릉도)]가 있었는데, 지증왕(智證王; 500-514 재위)이 그 섬 주민들을 신라 정부에 예속시키기 위해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이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자 섬 주민들이 두려워서 항복했다는 설화이다. 『삼국사기』 ‘지증마립간(智證⿇⽴⼲)’조에도 이와 유사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박이종이 아닌, 이찬 이사부(異斯夫)로 되어 있다.

  위의 세 사례는 주술은 아니되, 인간의 이지(理智)를 이용하여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주술적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실제로 전쟁에서 쓰였던 많은 주술들이 신비한 힘이라기보다는 위기적 한계상황에 처한 아군의 심리를 달래고, 적들의 판단을 혼란케 하는 위계 혹은 환술이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결국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의 전쟁기록에서 나타나는 주술적 사건들은 그 자체가 충실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역사를 기술하는 집단이 신라군과 그 왕조에 주술적 효과를 부여하고 싶어 했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신라본기에 풍성하게 나타나는 주술적 전쟁 설화들이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방증될 수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속의 전쟁에서 쓰였던 많은 주술들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신의 가호가 베풀어지는 상황을 조작해냄으로써 위기적 한계상황에 처한 내부 구성원의 심리를 달래고, 신적인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데 주로 이용된다. 또한 전쟁 상황에서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사용되는 다양한 종교적 방편이나, 적들의 판단을 혼란케 하는 위계 혹은 환술 역시 주술의 범주에 적용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두 역사문헌 속의 여러 사건에 나타난 주술은 엄밀히 말해, ‘사실’이라기보다는 의도된 ‘효과’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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