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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대론이라는 거짓말

유력 정치인들 자행하는 분열의 정치를 보면 암담

관리자( icomn@icomn.net) 2022.02.2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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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식(민주주의법학연구회 학술위원장)

  항간에는 온갖 세대 구분이 횡행한다. 대표적으로 86세대, X세대, 밀레니얼 세대, Z세대 등 연령을 기준으로 한 세대의 구분이다. 한편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친화적으로 태어난 듯한 Net 세대, 한미 FTA 반대 촛불집회를 주도했던 촛불 세대처럼 시기적 특수성에 따라 구분되는 세대도 있다. 여기 더해 88만원 세대나 삶의 여러 가능성을 포기했다는 뜻의 n포 세대처럼 경제적 관점에서 특화되는 세대 구분도 있다.

  얼핏 보면 그럴싸한 세대 구분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소위 ‘세대론’을 믿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년배들이 일정하게 공유하는 교감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교감이 특정 연령층만을 획일적으로 특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다소와 강약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서로 영향을 받으며, 때로는 배척하고 때로는 수용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의 연속을 우리는 역사라고 말한다.

  이처럼 세대론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지만, 굳이 문제적인 어떤 특정 세대를 거론하자면 딱 한 ‘세대’를 들 수 있겠다. 소위 ‘58년 개띠’로 상징되는 베이비붐 세대, 즉 대충 1955년 ~ 1963년에 태어난 여성들이다. 여기서 구태여 ‘여성’을 든 이유가 있다. 이 연령층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야말로 경제문제, 젠더문제, 돌봄문제, 교육문제, 청년문제, 노인문제 등등 한국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상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대 여성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경향을 가진다는 취지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간단히 도식화해보면 이렇다.

  이 세대는 일단 부모님을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으로부터 봉양 받지 못하는 첫 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스스로 가부장제의 잔재인 동시에 그러한 위치로 인해 다음 세대로부터 공격받는 세대이다. 경제개발을 위해 헌신한 주역이지만 경제위기 시대에 은퇴하는 세대이다. 은퇴 후 생활을 위해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자녀들을 어디 맡기지도 못하고 손수 키워낸 세대였는데 이제 손자 세대까지 양육하는 의무를 가지게 된 세대이다.

  이쯤 되면 이 세대에서 여성의 문제가 무엇인지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각각의 지위 속에서 이 세대의 여성은 실은 그 임무를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당사자였다. 내외가 아직 분명했던 이 세대는 남녀의 역할 구분이 상당히 엄격한 편이었다.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오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는 전형적인 젠더 역할의 구분이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늙으신 부모의 실질적 봉양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살림을 하고, 이젠 손자 손녀들을 키우는 역할의 대부분이 바로 이 세대 여성의 몫이었다.

  그런데 생계의 큰 몫을 담당했던 남편들이 현역에서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아직은 경제적으로 수입이 있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그동안 집에 있었던 이들 세대 여성들이 바깥으로 나가 일자리를 찾도록 내몰린다. 물론 은퇴한 남성들 역시 일자리를 찾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은퇴 이전과 같은 수입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 부족분을 보전하기 위해 여성들이 임금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예 경력이 없었거나, 또는 오랜 기간 경력단절 상태에 있었던 이 세대 여성들은 이제 저임금 중노동일지라도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은퇴해야 할 시기에 사회생활이 다시 시작되는 거다. 이전 세대는 환갑이 지나면 어르신으로 대접받았건만, 이 세대는 현역보다 더 열악한 처지를 감내하면서 어르신의 지위를 반납해야 한다.

  바로 그렇기에, 이 세대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 사회의 문제를 대충은 다 해결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거다. 이쯤 되면, 아니 이게 무슨 세대 문제인가, 이것은 경제문제가 아닌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 바로 여기에 세대론의 함정이 있다. 자칫 세대론은 이러한 경제문제, 사회문제, 정치적 문제를 은폐하는 도구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 부조리의 본질을 감추고 호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세대론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단순히 우려로 그치지 않는다. 정치인들이 현실을 왜곡하면서 자신의 명분을 확보하려 할 때, 흔하게 세대론을 동원하는 건 낯선 현상이 아니다. 금번 대선 정국에서 아전인수격으로 세대론을 들먹이는 후보들을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구조적 · 사회운동론적 세대론을 제시한 ‘세대 문제(1928)’라는 저서에서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은 같은 세대 안에서도 사회에서의 지위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물론 그 역시 같은 시대에 태어나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한 연령대가 존재한다는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실제 세대’라는 건 굳이 연령에 따라 구분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차라리 연령 단위로 구분되는 세대별 특수성을 굳이 ‘사회운동적 세대’로 구획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카를 만하임으로부터 근 100년을 격해 한국에서도 유사한 입장을 밝힌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이철승 서강대 교수인데, 그는 같은 연령대의 세대 안에서도 다양한 간극들이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소위 ‘386’ 안에서도 지방과 서울, 대졸과 고졸, SKY와 속칭 ‘지잡대’, 대기업과 중소기업, 임노동자와 자영업자 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대 간뿐만 아니라 세대 내에서조차 정치 · 경제적 차이는 벌어지고 불평등이 심화된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결국 ‘세대’의 문제라기보다는 계급의 문제가 된다.

  본질이 이러함에도 대선에 나선 정치인들이 세대를 가르고 같은 세대 안에서조차 남녀를 가르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정치인의 중요한 역할은 사회적 갈등구조를 표면화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갈등구조를 조정하여 내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가 이 역할을 못하면 결국 전쟁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베버(Max Webber)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인의 책임윤리가 필요한 상황인데, 작금 벌어지고 있는 유력 정치인들이 자행하는 분열의 정치를 보면 암담하기 짝이 없다.

  제자인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스승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공자는 “나이 든 사람을 편히 하고, 동년배(친구)가 서로 미덥게 하고, 다음 세대(젊은이)를 품어 안고 싶다(老人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고 답했다. 이 마음이야말로 오늘날 세대 간의 균열을 치유할 수 있는 훌륭한 정치사상이 아닐까 싶다. 세대론 따위를 조장하면서 있어서는 안 되는 적대를 만들어내는 오늘날 정치가들의 수준이 물경 2천 5백 년 전의 정치가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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