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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성령이 이끄시는 평화와 생명의 길 (1/3)

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문규현

우리신학연구소 편집부(여름호에서 전체내용 가져옴)( yespeace21@hanmail.net) 2022.06.2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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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유신체제가 성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74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전국민주청년학생 총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한국천주교회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을 규탄하며, 정권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또 이 사태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각 교구의 사제들은 효율적인 반독재투쟁을 전담할 기구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그 해 8월 10일 서울대교구에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하고 8월 26일 인천교구 사제단의 주도로 첫 전국사제단의 입장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9월 23일 원주교구 원동성당의 세미나에 약 300여명의 사제들이 참석해 전국 규모의 사제단을 결성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으로 명칭을 정했다. 

다음날 사제단은 기도회를 열고 사제단의 출범을 발표했으며, 9월 26일에는 서울 명동성당 기도회에에서 제1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국내외에 사제단의 출범을 알렸다. 

이렇게 시작된 사제단은 1970년 유신체제와 1980년대 신군부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으며,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통일운동, 생태운동에 헌신해왔다. 

두 차례 사제단의 대표를 역임했으며, 몸소 분단의 벽을 넘고 생명평화운동에 투신했던 문규현 신부를 만났다. 

순탄치 않았던 신학생 시절 그리고 부모님의 바람

문규현은 6대째 이어졌던 독실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 문정현 신부는 1966년에 사제서품을 받았고, 그도 사제가 되기 위해 대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대신학교 2학년때에 본당 사제의 눈밖에 나고 말았는데, 하루는 미사에 참여하지 말라며 부모님을 모셔 오라고 했다. 

본당 신부는 "바오로는 신부가 되기 쉽지 않겠으니 이쯤 학교를 정리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당시 문규현의 아버지는 사목회장으로 돈 한 푼 받지 않고 신부의 3,000여 수의 닭을 닭을 키우며 본당에 헌신하면서도 아들이 신부가 되지 못할까 봐 아무 말도 못하며 봉사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토록 교회에 헌신하고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랐는데, 그만둘 수 없었다. 

신앙심이 돈독하셨던 부모님은 그가 신부가 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셨다.

당시 소신학교 6년, 대신학교 2년 차인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그만둡니까, 저에게 시간을 좀 주셔요. 군대를 가겠습니다"하고 군대를 지원해서 갔다.

그는 카투사(주한미군 부대에 배속된 한국군)로 복무를 했는데, 그때 많은 유혹이 있었다고 한다. 같이 미국에 가자고 했던 친구도 있었는데,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3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본당으로 돌아왔는데, 자신과 갈등이 깊었던 사제가 본당에 여전히 있었다. 

문규현은 자신에게 성소가 없나 보다 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깊이 고민하니까 결국 부모님이 결단을 내리시더라고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먹고 살기도 신통치 않은데, 한 300~400평 있는 땅을 팔아 이사를 갔지요. 정말 한석봉 이야기가 따로 없지요. 이만큼 성소는 나에게 소중해요. 이 성소는 누구도 차별 없이 한 형제요 한 자매여야 하고, 사회가 그렇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어졌어요. 그렇게 신학교 생활을 했는데, 1971년도에 2학기에 복학하고 이듬해에 유신체제가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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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문규현 신부, 어머니 고 장순례 여사, 문정현 신부. 사진출처 뉴스타파>

 

유신헌법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탄생

 

1972년 10월 유신 선포는 그가 사회운동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해 11월 국민투표로 확정된 유신헌법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직접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는 등 사실상 '박정희 총통체제'가 구축된다.

유신헌법을 저지하기 위한 저항이 곳곳에서 가열차게 이어졌다.

그가 다니던 대건신학대학교(현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교에서는 최초로 유신 반대 시위를 했다.

삭발투쟁까지 해가며 격렬하게 맞섰지만 유신은 통과되고, 곧바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때 '모라토리움(유예기간, 현장체험기간)'과정을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사회 의식을 각성한다.

문규현이 아직 신학생이었던 1974년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어 이를 계기로 한국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된다.

그렇게 한국사회의 격변기였던 1976년 5월 3일 그는 사제서품을 받는데, 그 해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이 있었다.

이른바 '명동사건'은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김승훈, 함석헌, 함세웅, 신현봉, 안병무 등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긴급조치 철폐, 민주인사 석방, 언론,출판, 집회 등의 자유, 의회정치 회복, 대통령 직선제 요구, 사법권의 독립 등과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거사였다.

문규현은 서품을 받은 다음 날 '명동사건'으로 구속된 형 문정현 신부의 면회를 갔다.

면회는 사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면회 간 그의 어머니는 감옥에 갇힌 아들 신부에게 치명자 김대건 신부처럼 되어야 한다며 소망을 고백하는 자리였고, 첫 강복을 청하던 형 문정현 신부는 "사제의 길은 이렇게 고난의 길인데 함께 하겠냐"며 사제의 정체성 확인을 잊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3.1절의 수난'이 생생하다며 사회의 변화는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지만, 그럼에도 마침내 변화는 온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주저하지 않고 투신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문규현은 서품을 받고 전동성당의 보좌로 부임되었다가 그때 전주 교구장이었던 김재덕(1920~1988) 주교가 문규현에게 마음껏 일해보라며 사목적 배려를 해주어 3개월만에 고산성당의 주임으로 옮겼다.

김재덕 주교는 대표적인 사회참여파 주교였는데, 1979년 9월 10일 전주교구 사제단과 교회 단체가 함께한 서울 성신신학대학 교정에서 열렸던 전국 성체대회에서 강론을 통해 '현 정권의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주장했다. 

김재덕 주교의 이 날 강론은 주교의 강론으로는 가장 강경했는데, 박정희 군사정권은 김재덕 주교의 구속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까지 했다.

문규현이 주임으로 부임한 고산성당에는 젊은이가 거의 없다. 

대부분 서울이나 인천 같은 도시로 나가 노동자로 살아갔다. 

본당 사제로서 도시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을 외면할 수 없었고 노동문제는 사목의 과제가 되었다. 

1년에 두어번가량 고향을 찾아오는 청년들과 관계를 이어갔다. 

청년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들과 실컷 이야기하면서 회포도 풀고 같이 울고 웃고 그렇게 그들과 벗이 되었다.

그는 고산본당 주임으로 있으면서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활발하게 지원했는데, 전주교구는 전국에서 농민회 조직이 가장 활발했다.

공소마다 분회가 조직되었고, 분회가 모여 연합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삶은 교차하고 연대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사회적 복음의 차원에서 인권회복과 독재에서 해방 같은 대의 못지않게 저마다 일터에서 기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가는 일도 중요했다.

1985년이 되자 농민들은 '외국 농축산물 수입 반대 및 소값 피해 보상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해 7월 1일 경남 고성 두호분회의 첫 소몰이 시위를 시작으로 소몰이 싸움으로 전국적으로 퍼졌다.

전북 농민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동참해 진안과 임실, 부안 일대로 번져 나갔다.

당시 전주교구 교육국장으로 있던 문규현은 교구 농민회 지도 신부이자 고산성당 주임이었던 방병준 신부와 함께 고산과 완주의 소몰이 싸움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경찰의 강경진압은 부안군 하서면 집회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수많은 농민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의 가혹행위가 알려지면서 전북 농민이 소값 투쟁은 전국 집회로 번졌다. 

초기 투쟁은 가톨릭농민회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곧바로 기독교농민회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군 단위 투쟁에 참여한 인원만 1,000여명에 이르렀다. 

문규현은 1987년 가톨릭농민회 전국 지도신부로 내정되었는데, 인수인계까지 6개월가량 남아 골롬반회가 아일랜드에서 진행하는 '정의와 신앙 Justic&Faith 워크숍' 과정을 밟았다. 

'정의와 신앙 워크숍'은 세 달 동안 강의를 듣고 토론하면서 각자의 삶을 정립하게 해 주는 과정이었는데 여기서 구티에레스, 보프 신부 등을 만나기도 했다. 

이 과정을 거의 마쳐 갈 무렵, 주교에게서 귀국하지 말고 곧바로 미국 메리놀신학대학원으로 유학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미국에 갈 이유가 없었거든요. 전주교구 교육국장으로 일하면서 사제와 신학생 교육도 맡았고, 유학과 관련해서도 다 알고 있지요. 내가 유학한다는 소리는 전혀 없었어요. 주교님한테 내가 언제 유학한다고 그랬나며 돌아가겠다고 하니까 돌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때 정진석 주교가 가톨릭 농민회를 맡았어요. 내가 농민회에 들어가면 가톨릭농민회가 더 강화되게 생겼으니, 주교단에서 내가 농민회 지도신부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하더라고요. 주교님이 직접 나를 가톨릭 농민회 지도신부로 임명을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자기가 거두게 되었으니 한국에 들어오면 사건만 나게 생겼거든요. 그렇게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 문규현 신부의 의 성령이 이끄시는 평화와 생며의 길은 총 3부(상,중,하)로 올릴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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