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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성령이 이끄시는 평화와 생명의 길(2/3)

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문규현 신부

우리신학연구소 편집부(여름호에서 전체내용 가져옴)( yespeace21@hanmail.net) 2022.07.20 15:11

말지_문규현_임수경_판문점 내려오는 길 01.png

<말지 통권 39호 표지장면_아래 사진은 말지 전체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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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왼쪽)가 임수경의 손을 잡고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은 1989년 9월호 말지의 표지에서 발췌>

 

파스카의 체험, 분단의 장벽을 넘어선 ‘영의 역사’

문규현은 그렇게 뜻하지 않게 미국으로 가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때 미국에 감으로써 훗날 북한에 갈 기회가 생긴다. 메리놀신학대학원에서 정의와 평화의 관점에서 더욱더 깊은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한 사람 한사람이 모두 소중하고 다 연결되었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의 사유를 돌아보았다.

공부를 하면서 논문을 준비하는데, 지도교수는 한국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 주제를 바탕으로 신학을 정립하기를 요청했다. 문규현은 미국에서 지내다 보니 한국의 1987년 6월항쟁을 직접 겪지는 못했는데, 신학적 주제로 깊이 고민하다가 1988년 한국을 잠시 찾았다. 그때 문규현은 그해 5월 남북 공동올림픽 개최, 양심수 석방,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 투신한 조성만 열사를 만난다.

“잠시 한국에 왔을 때 조성만의 유서를 보니까, 그는 살아 있는 예수였어요. ‘내가 너를 분단된 한반도에 통일로 부활케 하리라’ 다짐하며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주제로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내 지도교수가 유대계 미국인인 마크 엘리스Marc H.Ellis였는데, 그는 나를 ‘내 스승이요, 내 학생인 문규현’이라고 소개하지요. 논문을 통과하자마자 나는 계획을 세웠어요. 내 앞에 있는 조성만의 영정이 항상 말을 걸어와요. ‘신부님 북도 내 형제고 내 자매입니다. 분단된 한국에서의 사제가 무엇입니까?’ 자꾸 이 친구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비록 내 논문은 어쭙잖지만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한국천주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논문 전반이 한국천주교회사를 다룹니다. 우리는 무엇을 선포할 것이냐, 평화를 선포하면 남북의 평화를 선포해야 할 거 아니냐, 그래서 기회가 되면 내가 북을 가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요.”

1989년 5월 그렇게 논문을 마친 그해 6월 6일 임진각에서 남북통일 공동 기원 미사를 하기로 했어요. 문규현은 전부터 누구든 하나가 북의 평양이나 판문점 등에서 미사를 해야지, 남에서만 하는 게 어떻게 공동미사냐고 문제제기를 하며 북에 가기를 자청했다. 함세웅 신부를 비롯해 입북을 만류했지만, 문규현은 교포사목을 거들다가 우연히 영주권을 획득했기에 문정현 신부에게 “걱정하지 마세요. 죽을 길 가는 것 아닙니다. 논문을 다 마치면 합법적으로 갈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영주권을 소지한 경우 해외 거주자는 당국에 서신 및 사전 사후 보고만 하면 북한 방문이 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 활동했던 메리놀 사제 조 베네로죠와 통일운동가 이행우 선생과 함께 북으로 가서 평양 장충성당에서 공동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문규현은 조성만 열사가 또 다른 예수로서 이렇게 분단의 십자가를 지고 죽었고, 그 예수의 파견으로 자신이 오게 됐다는 내용으로 강론을 했다.

아시아주교회의 인간개발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후 좀 더 적극적인 평화운동을 모색하던 무렵, 1989년 6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하기 위한 ‘임수경 방북 사건’이 있었다.

그때 문정현 신부는 교우였던 임수경과 가족을 걱정하며 사제 한 사람을 파견하자고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사목 차원에서도 굉장히 좋은 기회입니다. 남과 북의 교류를 막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우리 천주교 교리에 맞지 않고 성서적이지도 않습니다. 또 지금까지 통일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금기였습니다. 그것을 뚫어야 합니다. 우리 사제단이 그 금기를 뚫읍시다. 아마 이번 일로 엄청난 통일 논의가 벌어지고,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도 엄청난 논쟁이 벌어질 겁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겪고 넘어야 합니다.”

7월 7일 사제단은 만장일치로 문규현을 북한에 보내 임수경이 남한으로 올 때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뒤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는 문정현 신부를 찾아와 문규현 신부의 방북을 만류했지만, 문정현 신부는 자신이 형이라는 이유로 결정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인간개발위원회 총재인 요코하마 교구장 후미오 하마오 주교에게 공문을 보내 문규현이 북한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인간개발위원회의 승인을 받도록 요청하기로 했다. 하마오 주교에게 쓴 편지를 전달할 방법을 알아보는 도중에 ‘성남 노동자의 집’에서 일하던 메리놀선교회의 캔 부제가 일본에 간다는 소식을 들어 그에게 서류를 맡겼다.

캔 부제는 공항에서 걸리지 않기 위해 편지를 폐기하고 기억했다가 일본에 도착해 다시 기록했다. 문규현도 하마오 주교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직접 찾아갔다. 사실 하마오 주교는 도쿄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단 1970년 적군파에 의해 북한에 납치된 일본 민항기 요도호에 탑승해 북한에 끌려간 경험이 있었다.

“그 때문에 남북갈등을 잘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쭉 전달하니 흔쾌히 허락을 받아냈어요. 무릎 꿇어 강복을 받고 나온 뒤 혹시라도 걸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동경에서 나리타공항까지 택시를 탔어요. 택시요금이 무려 10만 엔이 나왔습니다. 나리타공항에서 한국으로 성사가 되었음을 알렸더니 환호성이 퍼졌어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7월 25일 두 번째 방북 길에 올랐어요.”

문규현은 임수경과 함께 판문점을 넘는 것은 물론 반헌법적인 국가보안법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야 했다. 주교단은 통일 문제에 대해 간담회를 갖고 주교단 담화를 발표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 신부 파북은 우리 사회의 상황에서 수용하지 못할 ‘유감’스럽고 많은 국민에게 우려와 불안을 준 것으로 마땅한 행동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사제들에 대한 사법 처리가 가져올 여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여론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검찰은 주교단 담화가 나오자마자 “백만 원군을 얻은 기분”이라고 환영했다. 검찰은 즉각 문규현 신부뿐만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 상임위원인 남국현, 구일모, 박병준 신부 등에 대해서도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7월 31일 정의구현사제단은 비상 총회를 열었다. 300여 명이나 되는 신부들이 모였다. 참석한 사제들은 상임위원회의 결단을 만장일치로 인준했다.

사실 북측에서도 판문점 통과를 부담스러워했고 제3국을 통한 귀국을 권유했다. 문규현 신부가 다른 사람을 통해 문정현 신부에게 전화로 연락했더니, 문정현 신부는 무조건 함께 판문점을 넘으라고, 그렇지 않고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1989년 8월 15일,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마침내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돌아왔다. 판문점을 넘은 그들은 곧장 국가안전기획부로 넘겨졌고 구속되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겨레의 하나됨을 위한 기도문’을 제정했다. 임수경과 함께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기 전 어느 날, 문규현은 판문점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오늘 이 순간 우리를 적시고 있는 이 비는 민족분단의 비극을 슬퍼하는 하늘의 눈물이고 또한 우리 민족의 눈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하고 외치면서 언제나 외침으로 끝날 수 없기에 오늘 이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대표해서, 또 민족적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저의 뜻에 함께한 천주교 아시아 인간개발위원회 위촉으로 그 사무국장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했습니다. 우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민족분단이라는 죄악을 통감하지 못한 채 소극적으로 지켜보고만 말았던 지난날의 역사를 깊이 뉘우치면서, 우리는 결코 둘이 될 수 없고 하나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평화는 분단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통감하고, 이 역사 앞에서 우리의 죄를 깊이 사죄하고, 우리 모두 역사 앞에 지은 죄악을 물리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분단 44년의 장벽이 결국 무너져 내렸다. 문규현은 판문점을 넘었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넘어 이집트를 탈출했던 파스카 체험과 같았으며, 한 마리로 영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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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남북평화철도 연결과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며 열린 남북철도 잇기 한반도 평화대행진단에 참여한 문규현 신부(왼쪽)와 생명평화마중물 사무국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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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대행진단이 6.25전쟁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현장인 경북 왜관철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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