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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설쳐야 산다

[서평]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이유리, 한겨레출판, 2020)

김경민( icomn@icomn.net) 2021.02.15 08:25

미국에 이민을 가서 30년을 산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미국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미국 이민 생활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한다면 어떨까. 듣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제3자도 황당하지 않겠는가.

젠더 이슈에서는 이런 황당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 여성으로 단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 페미니즘’은 틀렸는데, 왜 ‘이 페미니즘’으로 가지 않느냐며 비판을 한다. 성폭력을 당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성폭력의 공포를 경험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 그게 성폭력이 맞느냐 취조를 하고 그게 고소까지 할 일이냐 비난을 하고, 혹은 반대로 왜 이렇게 미온적으로 대처 하느냐고 훈계를 한다.

그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나는 그들이 그러는 것이 화가 나기에 앞서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간단하다. 한마디로 그들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그들이 그렇게 멋대로 생각하도록 놔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 사회는 내키는 대로 붓을 휘두를 수 있는 캔버스이기 때문이다. 빈 캔버스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 문제는 그들은 다른 사람(여성)이 이미 완성한(혹은 완성 중인) 그림에 함부로 덧칠을 한다는 거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이 마땅한 권리인 것 마냥 당당한 태도로 잘난 척까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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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금 캔버스를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의미로 썼다. 그런데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이유리 지음, 한겨레출판, 2020)을 보면 정말 문자적 의미로 이런 사례가 나온다.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는 프랑스의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가 1870년 살롱전에 제출하기 위해 완성한 <어머니와 나>에 모리조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심지어 그녀를 비웃으면서 마음대로 덧칠하는 짓을 했다고 한다.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은 오랜 세월 남자들만의 리그였던 미술계에서 여성 화가들이 어떤 고군분투를 했는지, 그들이 어떤 고통을 당했고 어떤 방식으로 ‘대상화’되었는지,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물리적 정신적 폭력에 시달렸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여성 화가들 뿐 아니라 아내와 모델 같은 자신과 친밀한 여성을 무시하고 착취한(그놈의 지겨운 ‘뮤즈’타령!) 남성 화가들도 여럿 등장한다. 예를 들어 피카소가 위대한 화가임에는 틀림없지만 동시에 그가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였던 것 역시 사실이다. 자신에게 순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의 연인을 정신병자 수감원에 가둬버린 렘브란트, 여성 모델들을 ‘멍청하다’며 노골적으로 멸시했던 르누아르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림 속 여성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많은 그림들이 등장하고,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아서 읽는 내내 시각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실려 있는 그림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을 하나만 뽑자면 이탈리아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자화상> (사진, 1638~1639년, 캔버스에 유채. 영국 런던 로열컬렉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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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사진, 1638~1639년, 캔버스에 유채. 영국 런던 로열컬렉션)

 

젠틸레스키는 17세 되던 해,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승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이후 10개월간의 고통스러운 법정 소송을 견뎌야 했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재판부 앞에서 그녀는 부인과 검사를 받아야 했고, ‘위증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손가락을 옥죄는 고문까지 받았다. 다행히 그녀는 승소했지만 고향인 로마를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고 개인 작업실을 마련해 마침내 능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았다. 이 <자화상>은 그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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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는 삶이 망가진 사람이 아니다. 폭력의 경험을 ‘삶을 압도하지 않는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에게서 ‘피해자다움’이 아니라 ‘생존자다움’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차라리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려 ‘가해자다움’을 보자. 가해자답게 ‘셀프 용서’하지 말기를, 가해자답게 숨죽이고 살기를, 가해자답게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건 생각도 하지 않기를, 가해자는 가해자답게 살도록 압박하자. 치욕은 성폭력 피해자의 짐이 아니라 가해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범죄를 저지른 대가는 가해자에게로.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pp.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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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간명하고 마땅한 발언이 아닌가. 이 발언의 어디가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려운가.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미덕을 꼽자면 여성의 고통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과 태도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들이 처하고 선택한 상황은 제각각이다. 화가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고통에 무너져버린 여성도 있고 끝내 그것을 이겨낸 여성도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그들 사이에 어떤 차별이나 위계를 두지 않는다. 그 여성들은 모두 여성이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종류의 고통을 겪어내야 했던 개별적이고 존엄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그 고통에 대한 공감과 존엄함에 대한 존중과 여성에 대한 자매애가 이 책의 전반에 흐르고 있다.

 

이 책에도 등장하는 말인데, 한 남성 개그맨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다”라고. 그는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역시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도록 놔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니? 그런데 어쩌니. 여자들이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거 이제 시작일 뿐인데. 아니지, 사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단다. 여자들은 더 설쳐야 해. 그래야 살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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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교사를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며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를 비롯해 네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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