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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코로나 시절을 멕시코에서 견디는 법

지금까지의 사망자가 ‘겨우’ 40 여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어쩌면 기적 같이 느껴진다

림수진( icomn@icomn.net) 2021.02.16 15:57

‘페스트를 조심혀~’라는 마을 촌로의 당부 한마디와 함께 코로나바이러스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 날 아침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산책 중이었고, 마침 밭에서 무우를 뽑고 계시던 마을 ‘거북이 어르신’이 나를 보면서 하신 말씀이다. 처음엔 ‘페스트라고?’, 순간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코로나바이러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프리카 에볼라바이러스만큼이나 멀리 느껴지던 그 바이러스가 멕시코에도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이었다. 딱 1년 전의 일이다.

그 사이 마을이 봉쇄된 적도 있었고 마을 안에서 많은 감염자들이 나왔으며 그 중 일부는 목숨을 잃었다. 작은 소읍인지라, 누구의 죽음이라도 익명의 타인일 수 없었다. 조금 멀리 건너간다 해도 결국은 내가 알 수밖에 없는 아무네 누군가였다. 잠시 피하면 될 것 같았던 난리의 시절은 때론 느슨해지고 하고 때론 격해지기도 하면서 해를 넘겼다. 내가 사는 작은 소읍 2만 명 인구 중에 46명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그 사이 코로나바이러스는 수 차례 내 곁을 스쳐갔을 것이다.  때론 그야말로 습자지 한 장 정도의 차이로 가까워졌을 것이고, 때론 조금 거리를 두면서 내 곁에 머물렀을 것이다.

일년 중, 성탄절이라는 가장 큰 명절이 있었던 지난 12월이 지나면서 마을엔 다시 한번 바이러스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가까운 이웃들이 죽었고 나 역시 그들이 죽기 며칠 전 서로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길에서 만나 길게 이야길 나누었으니 그들의 죽음 소식 앞에 슬픔보다 아찔한 마음이 먼저 몰려온다. 아마도 내가 대한민국 뉴스를 듣지 않는다면 아무렇지도 않을 일이겠으나, 행인지 불행인지 이곳에서 나는 매일 대한민국 뉴스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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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학교가 닫히자 아이들은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사진: Angela Moor)

 

대한민국의 방역 수준과 대한민국의 시민 의식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 시기 이 곳에서의 삶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의 삶과 다름없다. 물론 적은 바이러스다. 보호막은 없다. 보호 장구도 없다. 전선도 없고 눈에 보이는 적의 실체도 없다. 그냥 우리 곁에 시시각각 다가섰다가 물러서길 반복할 뿐이다. 조심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적당한 방역 시스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니, 아무래도 복불복, 혹은 운칠기삼으로 흘러간다.

감염자는 있을지라도 확진자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고 집 안에 감염자가 있더라도 그 외 가족들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감염된 가족을 차에 싣고 인근 도시로 나가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병상을 구하기도 하고 TV 방송 리포터들은 이제 막 코로나바이러스 검사에서 양성 결과를 받고 나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기도 한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묻는 리포터에게 집에 갈 것이라 답하는 확진자들은 곧 길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택시를 잡아탄다.  그러한 장면들에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멕시코에서 하루 사망자가 1천명을 훌쩍 넘어서면서 1월 중순, 여러 나라들이 다시 국경을 닫기 시작했다. 미국이야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후 지난 3월 이후 계속하여 육로 국경을 닫은 상태이고, 그간 비교적 관대했던 캐나다 역시 국경을 닫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1월 말 이후 멕시코를 오고 가는 모든 항공기 운항을 전면 중단시켰다.

한국행도 다시 어려워지고 있다. 물론 지난 1년 간 매우 불규칙적으로 결항과 연기를 반복하면서 멕시코와 한국 간 비행기 운항이 이루어지던 상황이라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엔 출국 72시간 전에 PCR 검사를 하고 그 검사서를 영문이나 국문으로 공인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걸렸다. 출국 전 72시간 안에 검사를 하고 결과를 받고 번역하여 공인인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러니 한국을 가게 될 날도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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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학교가 닫히자 아이들은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사진: 림수진)

 

물론 지금의 난국이라면 그저 있는 그 자리에서 바짝 엎드려 상황을 주시하는 것이 백 번 낫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도무지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니 감히 맘 먹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누군가는 당장 한국을 가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으니, 부디 엄청난 수의 허들을 뛰어넘어야 하는 장애물 달리기 같이 느껴지는 난관을 잘 극복하길 바랄 뿐이다.

그간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각 때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이곳 사람들을 옥죄는 양상은 조금씩 달랐다. 때론 막연한 공포가, 때론 턱없이 부족한 병상과 의료진이, 그리고 때론 코로나바이러스 이면의 배고픔과 자유의 제한이 이곳 사람들의 삶 앞에 뚜벅뚜벅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금은 산소가 문제다. 그렇다 산소가 가장 큰 문제다.

병원이야 기왕에 바랄 수 없는 것이라지만, 산소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절망과 패닉 상태로 몰고간다. 작년 12월부터 크고 작은 산소통을 밀고 끄는 사람들이 거리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산소포화도가 현저히 떨어진 환자를 구하기 위해 가족들이 빈 산소통을 들고 거리에 나선 것이다. 문제는 하루가 다르게 산소 구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  병원에서조차 산소를 구하지 못해 아우성인 시절이니 개인이 산소를 구하는 일이란 그 몇 곱절은 더 어려울 것이 뻔하다.

불과 몇 시간 쓸 수 있는 양의 산소를 구하기 위해 가족끼리 번갈아 가며 하루 종일 줄을 선다. 그나마 가지고 간 산소통에 산소를 채울 수 있으면 다행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줄을 서고도 자신의 순서가 오기 전에 산소가 떨어지면 다시 또SNS를 통해 산소를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야 한다. 이들을 두고 ‘산소 순례자’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산소를 구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참아가며 선 줄이 곧 생명줄인 셈이니 바로 자신의 순서 앞에서 산소가 떨어졌다는 소식은 사망선고에 다름 아니다. 며칠 전 TV방송에 포착된 어느 여인의 절규가 여전히 귀에 쟁쟁하다.  하루 종일 빈 산소통을 안고 줄을 섰지만 바로 자신의 순서 앞에서 산소가 떨어졌다는 가게 주인의 말에 여인은 무너져 내렸다. 산소통을 한 번 채우기 위해 보통 예닐곱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가족들 중 일부는 직장을 관두게 되는 상황도 발생한다.

이 와중에 산소와 산소통 가격이 뛰는 것은 당연지사, 산소와 산소통을 둘러싼 사기와 절도가 기승을 부린다. SNS 상에 산소 혹은 산소통을 판다고 광고를 올리고 돈만 챙기고 사라지는 사기꾼들이 있는가 하면 산소통을 싣고 오는 컨테이너 차량을 통째로 납치해버리는 조직 범죄도 횡행한다. 정부가 나서서 산소를 둘러싼 크고 작은 범죄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평소보다 대여섯 배 가까이 폭등한 산소와 산소통 가격은 여전히 고공행진 중이고 각 곳에서 산소 절도와 사기 소식도 꾸준히 들려온다. 집에 산소포화도가 60% 이하로 떨어진 가족을 둔 채 거리 곳곳을 전전하며 산소를 구하는 가족들의 눈물 어린 인터뷰는 차라리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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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PC방도 늘 아이들 차지다.사진: 림수진)

 

2021년 2월 13일 현재 멕시코에서 1차 백신을 접종 받은 사람들의 숫자는 70만 명이다. 전체 인구로 본다면 0.57%에 해당한다. 일차로 의료진들이 접종을 받고, 이후 80대 이상부터 연령 기준으로 접종이 이루어진다는 계획이 발표되었지만, 하루 멕시코로 들어오는 백신의 양의 겨우 몇 만명 분에 그치는 상황이라 전 국민 접종에 대한 청사진은 아직 기대하기 조심스럽다.

지난 1월 말 멕시코 대통령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보름 여 후 회복하여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자신은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작은 소읍 우리 마을 안에서도 여전히 마스크 사용이 강제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출현하기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산다.

작년 3월 이후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은 늘 마을 안에서 놀 방편을 찾는다. 물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몰려다니지만, 아직까지 아이들이 아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어른들도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지난 주말에도 우리집을 둘러싼 사방 각 곳에서 밤 늦도록 파티가 이어지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사망자가 ‘겨우’ 40 여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어쩌면 기적 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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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마을이 봉쇄되자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안에서 놀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고, 그 답을 코로나바이러스가 절대로 닿지 못할 것 같은 마을 위 화산 자락 곳곳 걷기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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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바그다드 까페라 이름 붙인 우리 마을 사랑방이다. 마을에서 화산 치맛자락 사탕수수 밭을 헤집고 15리를 걸어야 한다. 어느 일요일 오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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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수진(Lim, Su Jin),

멕시코 콜리마주립대학교 정치사회과학대학

(Facultad de Ciencias Políticas y Sociales, Universidad de Colima)

 

일곱 살 먹던 해 겨울, 할머니를 따라 서울에 갔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서울역 광장에 단아하게 선,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서울역사 앞에서 짜릿한 흥분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각인이었습니다. 이후 늘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였습니다. 결국, 이다음에 크면 반드시 관광버스 운전수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진 못하였습니다. 대신, 지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핑계 삼아 원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만 서른 살이 되던 2001년, 코스타리카로 갔습니다. 19세기 말 파나마 운하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의 증손자 쯤으로 신분을 둘러대고 커피밭에 ‘위장취업’을 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커피를 따면서 3년을 보냈습니다. 하루 1달러도 벌지 못하는 저 ‘불량노동자’를 걱정하며 자신들이 딴 커피와 음식과 마음을 나눠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대부분이 니카라과에서 건너온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들의 삶을 좇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이후 현재, 멕시코 콜리마주립대학교 정치사회과학대학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주’, ‘국제분쟁’, ‘지정학’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2010년 이후 멕시코 연방정부 고등과학기술위원회 소속 국가연구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커피밭 사람들: 라틴아메리카 커피 노동자, 그들 삶의 기록>, <21세기 중앙아메리카의 단면들:내전과 독재의 상흔>, <세계의 분쟁(공저)>, <디코딩라틴아메리카: 20개의 코드(공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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