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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요리와 한약의 과학

한성주( icomn@icomn.net) 2021.02.22 14:38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늘어나면서 식당엔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는데 여전히 먹고 싶은 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것도 혼자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초등학생인 딸이 유튜브를 보고 뚝딱뚝딱 요리를 만드는 것을 보고 딸과 친해지고 싶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에서 시작했는데, 그동안 요리라는 것은 날 것을 불에 익혀 먹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던 제가 막상 내 손으로 재료를 만지고 양념을 하고 조리를 하다 보니 같은 재료로 조리를 해도 아내가 한 음식이 훨씬 맛있는 것을 보고 이 맛의 차이란 것이 과연 어디서 나는지 매우 궁금해졌습니다. 흔히들 ‘손맛’ 이라는 정체 모를 스킬로 규정하고 있는, 흔히 ‘며느리도 모른다’는 이 비법이 무엇인지 말이죠.

 

요리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인터넷에서 각종 정보를 찾아보다가 몇 권의 책을 소개받아 읽고 있는데, 이럴 수가! 요리의 세계는 너무나 흥미롭고 아름다운 과학과 예술의 무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온갖 유기화학의 이론들이 동원되고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가 쏟아져 나오는 요리라는 세계는 결코 생존을 위해 영양소를 섭취하면서 배탈 나지 않게 불에 익혀 먹는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재료의 종류에 따라, 또 원하는 맛과 향에 따라 불의 세기, 즉 반응 온도를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당연히 요리 시간 또한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초보는 본래 장비에 관심을 두게 되는 법인지라 저 또한 조리용 온도계부터 시작해서 아래 위 두 개의 불판을 가진 전기 그릴, 수비드 머신과 진공 포장기 등 각종 조리 기구들을 장만하다 보니 한약을 달이는 과정도 요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흥미로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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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수비드(Sous Vide) 기계로 조리하는 모습 ,출처: anovaculinary.com)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약 중에 ‘경옥고(瓊玉膏)’ 라는 약이 있습니다. 한의사가 좋아하는 약이 따로 있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약은 적잖이 고생스럽지만 그 제조과정부터 참 낭만적인 약이라 한의대생들이 실습삼아 많이 만들어보는 처방입니다. 저 역시 한의대 재학 당시에 동기들과 일주일씩 산채를 빌려 직접 만들어 보기도 했는데 동의보감에서 가장 처음으로 소개되는 ‘본성을 길러 오래 살게 하는 약’이 바로 이 경옥고입니다. 그 옛날에 약효를 얘기할 때 ‘오래 살게 해준다’ 는 건 아마 ‘젊어 진다’ 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누가 오래 사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을 테니, 노화현상의 반대되는 효능이 있다면 곧 오래 살게 될 것이라 기대하게 되었겠죠. 이 경옥고의 효능이 대부분 늙지 않고 젊어진다는 내용입니다. 현대에도 경옥고는 큰 병을 앓고 난 후에 회복을 시켜주는 보약으로 쓰거나 평소에 오래 복용하면서 건강을 관리해주는 보약으로 많이 쓰이고, 약효에 비해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기 때문에 선물용으로 가장 많이 나가는 약입니다. 게다가 기침을 오래 하거나 호흡기 계통이 약한 환자에게 좋다고 알려져 있어 요즘처럼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유행할 때는 더 인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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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경옥고를 만드는 과정. 지금은 모두 한의사 선생님들이 되어있는 당시 한의학과 대학생들의 공동작업)

 

이렇게 대단한 약으로 보이지만 경옥고의 약재 구성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생지황, 인삼, 복령과 꿀. 이렇게 4가지가 끝이니까요. 물론 그 제조 과정은 결코 단순치가 않습니다. 인삼과 복령은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들기만 하면 되지만 생지황은 흙을 모두 털어내고 물로 씻어 말리고 즙을 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물 한 방울 섞이면 안되고 쇠붙이가 닿아서도 안됩니다, ‘금(金)의 기운이 약성을 상하게 한다’ 고 해석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생지황은 원래 쇠에 닿으면 철을 산화시키면서 색깔이 검게 변하므로 쇠에 닿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경옥고는 늘 나무숟가락을 동봉하여 배송하지요. 사실 요즘 사용하는 금속 숟가락은 다 산화를 막는 코팅이 되어있거나 스테인레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조금 닿아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은하지만 왠지 금기를 지키는 재미가 있어 쇠붙이는 절대 피하는 편입니다. 꿀은 약한 불에 계속 가열하면서 불순물을 골라내고 불필요한 향을 날려 보내는 ‘연밀’ 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동의보감에는 이렇게 준비된 약재를 한 데 섞어 달이는 과정이 다른 약과 달리 매우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고르게 반죽된 이 약재들은 항아리 안에 넣고 기름종이 5겹과 두터운 베 1겹으로 항아리 입구를 밀봉한 뒤에 구리로 만든 솥에 넣고 물 속에 매달아 항아리 입구는 물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뽕나무 장작으로 3일 밤낮을 달이되 솥 안의 물이 줄어들면 따뜻한 물을 보충하고 3일이 지나면 다시 납지로 항아리 입구를 밀봉한 다음 우물 안에 하루 밤낮을 담가 식힙니다. 그리고 다시 꺼내어 처음에 했던 대로 구리 솥에 담가 하루 밤낮을 더 달이면 끝이 납니다. 이 외에도 개소리가 들리면 안되고 부인이나 상복을 입은 사람이 보면 안되는 등 다른 내용들도 있지만 이것은 그 당시 도교의 영향이나 문화적인 풍습과 관련된 것일 테고, 약을 달이는 과정이 요즘 유행하는 ‘수비드(Soud-vide)’ 기법과 매우 유사합니다.

 

수비드란 불어로 ‘진공 상태’ 라는 의미인데 물을 끓이지 않고 적당한 온도를 계속 유지하면서 장시간 재료를 넣어 익히는 요리기법입니다. 재료는 진공포장을 해서 물에 담가두기 때문에 수비드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경옥고 역시 항아리를 물에 담가 중탕을 하는데, 그 옛날엔 항아리를 밀봉할 방법이 없으니 기름종이와 베로 입구를 막았겠지요. 뽕나무 장작은 불이 쉽게 붙지 않고 한 번에 뜨겁게 타오르지 않지만 은근한 불을 오래 태울 수 있다는 특성이 있다고 하니 3일 밤낮으로 수비드 조리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작이었겠지요. 우리는 가스불을 조절하여 90도에서 98도 정도를 항상 유지하도록 조리용 온도계를 사용했습니다. 중간에 하루 밤낮을 우물에 담가두는 이유는 무엇인지 늘 궁금했는데, 수비드한 요리를 바로 먹지 않을 때는 얼음에 담가 순식간에 식혀 보관을 합니다. 이는 고온에서 빠른 속도로 식혀서 세균이 번식하기 좋은 미지근한 온도를 순식간에 지나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경옥고도 그렇게 칠링을 한 후 마지막에 하루를 더 중탕하는데 그 후에도 우물물에 담가 식히는 것이 좋았을 것 같네요.

 

이 외에도 한약재를 다루면서 어떤 약재는 볶아서 써야 하고 어떤 약재는 술에 담갔다가 써야 하고, 어떤 약재는 찌고 말리고를 반복해야 하는 일종의 조리법들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했었는데 다시 논문들을 찾아보고 공부를 할 흥미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옛말에 약식동원(藥食同原)이라고, 약과 음식은 근본이 같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게 다 고기를 좀 더 맛있게 먹으려다가 생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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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 : 한의사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IBM Korea 에 잠시 근무를 했다가 세명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한성주한의원(경기도 성남시 판교지역) 원장으로 진료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센인들을 위한 회보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고, CBS 팟캐스트 '스타까토' 에서 정치시사관련 인터넷방송을 한 적이 있으며 국방FM '너를 사랑하기에 전유나입니다' 에서 수요일 고정 코너로 '한성주의 세상풍경' 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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