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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매화를 찾아서

김영문( icomn@icomn.net) 2021.03.22 15:05

해마다 이맘때면 탐매(探梅)에 나선다. 말 그대로 매화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지막 추위를 뚫고 피어난 매화를 찾아서 봄을 미리 체감하는 여행이라 할 수 있다. 매화는 설중매(雪中梅)나 빙매(氷梅)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늦겨울 눈 속이나 얼음 속에서도 꽃을 피우므로 가장 일찍 봄을 예비하는 전령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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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 한국관광공사)

 

매화 중에서 가장 일찍 꽃을 터뜨리는 종류는 납매(臘梅)다. 개화 시기가 무려 음력 섣달이므로 섣달 납(臘) 자를 써서 납매라 부른다. 고운 노랑 꽃에다 짙은 향기가 사람을 유혹한다. 재작년 장성에 거주하는 지인이 눈 속에 핀 납매 사진을 여러 장 보내줘서 며칠 간 바라보며 황홀함 속에서 지냈다. 중국 베이징에 유학할 때 지도교수 서재에서 꽃병에 꽂아둔 납매를 처음 보고 그 짙은 향기에 취한 이후 아직도 우리나라의 납매는 접해 보지 못했다. 이제 시절 인연이 맞으면 납매를 찾기 위한 여행에 나설 생각이다.

우리나라의 고매(古梅)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꽃을 피우는 명매(名梅)는 통도사 자장매(慈藏梅)다. 대개 1월 말에서 2월 초순, 늦으면 2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 이 역시 납매처럼 음력 섣달에 봄소식을 전한다. 자장매라는 이름을 듣고 통도사를 세운 신라 선덕여왕 때의 고승 자장율사가 심은 것으로 짐작했지만, 직접 가서 안내판을 읽어보니 임진왜란 이후 통도사를 중창할 때 저절로 돋아난 매화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나이가 이미 수백 년을 넘은 고매임이 틀림없다. 기품 있는 고목에서 피어난 분홍색 꽃잎과 은은한 향기가 일품이다.

이어서 빠르면 양력 2월 말부터 3월 초·중순에 걸쳐 화엄사 흑매(黑梅)가 꽃을 피운다.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옆에 있다 하여 각황매, 또는 각황전의 옛 이름인 장륙전(丈六殿)에 연원을 두고 장륙매라고도 부른다. 줄기가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으며 가지가 둥글게 퍼져나간 몸체로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특히 이 장륙매는 색깔이 너무 붉어 검은빛을 띠므로 흑매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매화를 직접 보면 단아한 홑꽃잎의 어여쁜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이처럼 작고 고운 꽃이 천 송이 만 송이로 가득 피어 꽃 대궐을 이룬다.

사람들은 화엄사 매화 탐방을 흔히 흑매 보기에서 그치지만, 화엄사에는 흑매보다 더 오래된 고매가 있다. 화엄사 옆 자락으로 더 올라가면 길상암 앞에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지정된 야매(野梅)가 우뚝 서 있다. 야매란 야생 조수가 매실을 먹고 배설하여 자연 상태에서 자라난 매화다. 화엄사 야매는 색깔이 흰 백매(白梅)다. 숲에서 자랐으므로 하늘로 높이 뻗어 오른 교목(喬木)의 형태를 보이며 소박하고 담담한 꽃이 은은한 향기[暗香]를 발산한다.

화엄사 흑매와 거의 같은 시기 또는 조금 뒤에는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가 연분홍 꽃을 피운다. 백양사에 조계종 고불총림(古佛叢林)이 있으므로 고불매라 부른다. 이 매화 역시 나이가 300~400년에 이른 고매다. 색깔은 자장매보다 연하지만 줄기가 훨씬 굵은 데다 가지가 옆과 위로 구불구불 휘감아 나간 모습에서 고매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절집 담장과 와옥을 배경으로 고불매가 꽃을 피운 정경은 한 폭의 옛 그림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 언급하지 않은 와룡매, 율곡매, 선암매, 대명매, 남명매, 계당매 등도 모두 나름의 역사와 기품으로 명매 목록에 올라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매화는 섣달 혹한을 뚫고 피어나므로 옛날부터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사랑받았다. 절개와 기품을 중시하는 선비의 꽃으로 여겨 수많은 시인묵객이 매화 시를 읊고 매화 그림을 그렸다. 중국 북송의 유명한 문인 임포(林逋)는 “매처학자(梅妻鶴子)” 즉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아” 한평생 은일처사로 살았다. 그는 “맑은 시내에 성근 그림자 가로 비끼고, 달 뜬 황혼에 그윽한 향기 스쳐 떠도네(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매화를 형용하는 가장 유명한 어휘인 암향(暗香)과 소영(疏影)이 여기에서 나왔다. 남송 사인(詞人) 정역(鄭域)은 「소군원(昭君怨)·매화(梅花)」란 사(詞)에서 이른 매화를 보고 “꽃은 피었다고 하지만 봄은 아직 오지 않았고, 눈이 왔는가 했더니 은은한 향기가 다르네.(道是花來春未, 道是雪來香異.)”라고 읊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대학자 퇴계 이황도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이라 불렀으며, 평생토록 72제(題) 107수(首)에 이르는 매화 시를 남겼다. 심지어 퇴계는 임종을 맞아 “저 매화에게 물을 주라”는 유언을 남겼으므로 평생토록 매화의 지조와 풍격을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할 만하다. 또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이육사는 「광야」에서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라고 읊으며 매화를 불굴의 지사에 비유했다.

올해는 꽃샘추위가 심하고 며칠 전 큰 눈까지 내려서 매화 상태가 예년보다 못하다. 2018년으로 기억하는데 화엄사 흑매가 꽃을 피우다가 때늦은 눈보라를 만나 안타깝게 시들고 말았다. 우리는 눈보라 속에 핀 매화를 사랑하지만 그 눈보라를 견디는 매화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세한삼우(歲寒三友)니 사군자니 하는 수사로는 눈보라 속 매화가 견디는 고통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역사 속 열사와 지사들의 순절을 우리는 경배하지만 그들의 신산(辛酸)한 삶과 고난은 피부로 체감하지 못한다.

심지어 올바른 행동과 성실한 삶이 조소와 희화의 대상이 되는 이 시절, 또 이리 같은 야망과 독사 같은 흉심을 숨기고 진실을 호도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횡행하는 이 시절, 눈보라를 무릅쓰고 피어난 매화는 우리에게 더욱더 서러운 느낌을 전해준다. 빙설을 무릅쓰고 지키려 한 것이 무엇일까? 지금도 저 고고하고 애달픈 매화는 고운 꽃빛과 은은한 향기만 발산할 뿐 아무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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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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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학자. 번역가.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문학박사.

중국 베이징대학 방문학자(한국연구재단 Post-Doc.)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역임.

경북대, 서울대, 한국교통대 등 대학에서 다년간 강의.

저서: 『노신의 문학과 사상』(공저), 『근현대 대구경북 중국어문학수용사』(공저) 등,

역서: 『동주열국지』(전6권), 『원본 초한지』(전3권), 『삼국지평화』, 『정관정요』, 『자치통감을 읽다』, 『문선역주』(전10권 공역), 『루쉰전집』(전20권 공역) 등 3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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