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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낡은 정치가 만들어낸 죽음들

윤현식( icomn@icomn.net) 2021.03.29 14:54

2019년 10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주재 111개국 대사 부부를 청와대 리셉션에 초청했다. 대통령이 각국 대사를 리셉션에 초청해 편안한 분위기에서 여러 사안을 논의하는 건 그 자체로 별다른 사건이 아니다. 그런데 이 리셉션이 관심을 끌게 된 건 뉴질랜드 대사 부부 덕분이다. 당일 리셉션에 함께 참석한 필립 터너 대사와 그의 배우자인 히로시 이케는 동성부부였다. 리셉션 이후 필립 터너 대사가 트위터로 참여사실을 알리면서, “문재인 대통령님 덕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주한 외교관의 동성배우자에게 비자를 발급한 것에 대하여 치하했다. 필립 터너 대사는 동성혼 관계에 있는 히로시 이케와 현재 27년째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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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필립 터너 뉴질랜드 대사 트위터 캡쳐)

 

뉴질랜드는 1993년 「인권법(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했고, 2013년 혼인평등법(Marriage Equality Act)을 제정하면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혼인평등법 이전에도 뉴질랜드의 성소수자들은 시민결합(civil union: 동성 간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는 법적 관계)을 인정받으면서 차별받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율의 성소수자 의원을 보유한 나라다. 2020년 총선 결과, 뉴질랜드 의회는 120명 정원 중 13명이 성소수자 의원이 탄생했다. 의석 중 11%를 점하는 비율이다.

 

그런데 정작 필립 터너, 히로시 이케 부부를 리셉션에 초청한 현 정부는 여전히 「차별금지법」 제정에 소극적이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노력은 꽤나 오래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2007년 12월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하였다. 하지만 법제사법위원회 논의과정에서 중요한 차별제한 규정들이 삭제되거나 무의미하게 변형되었고, 그나마도 17대 국회 임기 만료까지 처리가 되지 못해 자동 폐기되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민주노동당, 진보통합당 등 진보정당에서 법안을 발의했다. 민주통합당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법안을 발의하였다. 그러나 진보정당에서 낸 법안은 별다른 성과 없이 임기만료에 따라 자동폐기되었다. 민주통합당의 법안은 두 차례 모두 일부 기독교계의 압박을 핑계로 철회되었다.

 

「차별금지법」은 박근혜 정부에서는 논의가 없었고 20대 국회에서는 아예 법안 발의 자체가 없었다. 그러다가 21대 국회가 구성된 이후인 2020년 6월 말, 정의당 장혜영 의원 대표발의로 「차별금지법」안이 다시 발의되었다. 한국의 「차별금지법」 제정이 정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국제사회의 우려와 권고도 계속되고 있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는 2009년과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권고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장혜영 의원 대표발의안이 발의된 직후인 7월 1일 국회에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안은 여전히 계류 중이고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무엇보다도 법을 만들어야 할 정치인들이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현직 대통령은 대선 토론회 당시 동성애에 “반대한다”,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개진했다가 며칠 만에 한 발 물러섰다. ‘군대 내 동성애’에 한해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끝내 상황논리를 버리지 않았다. 성소수자의 완전한 권리보장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이야기다. 자국의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듯 답보상태를 이어가면서도 대통령이 된 후 뉴질랜드 대사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한 것은 그래도 좀 나아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최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유력 주자들 역시 어슷비슷하다. 여당의 시장후보로 유력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2016년 「차별금지법」 반대의 입장을 밝혔었다.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이후에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다면서도 여전히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없다. 선거전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 안철수 후보는 한 토론회에서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할 의향이 있느냐는 금태섭 후보의 질의에 “그런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제1야당의 유력 후보인 오세훈 후보는 퀴어축제 개최장소에 대해 “시장 개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정책적 방안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에 대하여 유권자들에게 평가를 받아야 하는 선거에 임하는 후보들이 이런 수준이다. 인권의 보편성, 혐오와 차별의 해소처럼 정치인의 소명으로 수행해야 할 대의에 대해 이들은 침묵한다. 차별을 선동하는 일부 종교집단이나 극우보수의 눈치를 보면서 이를 정치라는 명목으로 합리화한다. 이런 질 낮은 인식이 보궐선거에 출마한 일부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심각한 문제가 잠복해 있다. 극히 일부의 정치인들만이 이런 수준이고, 다른 대다수 정치인들이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차별금지법」은 벌써 제정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늦추고 있는 사이, 거기에 더해 주요 정치인들이 무분별하게 혐오와 배제의 언어를 늘어놓는 사이, 사람들이 죽어간다. 지난 2월 24일, 무지개 정치를 염원하던 김기홍 활동가가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바로 며칠 후 “기갑의 정신”으로 살겠다던 변희수 하사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두 사람 모두 성소수자였으며,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맞서 당당히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드러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사회에 바란 것은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동료 시민으로 인정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쏟아진 차별과 혐오의 폭력은 결국 이들을 삶으로부터 격리시켰다.

 

김기홍 활동가는 떠나기 전 자신의 SNS에 절절한 절규를 남겼다.

“우리는 시민이다. 시민. 보이지 않는 시민, 보고 싶지 않은 시민을 분리하는 것 그 자체가 주권자에 대한 모욕이다.”

 

법학자인 홍성수는 그의 저서인 ‘말이 칼이 될 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 그건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이것이 과연 실체가 없는 고통일까? 개인의 특수한 고통일 뿐일까?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과연 존엄하고 평등한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김기홍 활동가와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통해 다시 절절하게 떠오른다.

 

외국 대사와 그의 동성배우자가 청와대 리셉션에 초대받는 일이 뉴스가 되었다는 건 성소수자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가 아직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반증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조차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는 낡은 정치의 한계이다. 대선이 불과 1년 남았다. 1년 후 우리는 어떤 후보들이 공공연하게 혐오와 배제의 말들을 쏟아내는 걸 망연히 보고 있어야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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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식

한국미래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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