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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일성 회고록과 ‘빨갱이’와 국가보안법

윤현식( icomn@icomn.net) 2021.05.28 08:05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명작 ‘주홍글씨’의 도입부에서, 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아기를 안은 채 광장으로 끌려 나온다. 그런데 헤스터 프린이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엄마가 아기를 보호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아기의 몸으로 자신의 가슴에 붙어 있는 어떤 표식을 감추려는 듯이 보였다. 그 표식은 빨간 금실로 수를 놓고 테를 두른 “A”자였다. 소설의 제목이 된 ‘주홍글씨’이자 간통의 표식이었다.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는 와중에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가슴에 ‘다비드의 별’을 달고 있었다. 절멸을 당해야 할 민족이라는 표시였다. 그리고 실제 그 표시를 달고 있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대량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과거의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은 이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 상당수의 이스라엘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이라는 말은 패배자이자 적이며 신의 이름으로 말살해도 되는 존재로 이해된다.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붙어 있던 표식은 이 사람이 죄인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한다. 유대인들의 가슴에 붙어 있던 표식은 그들이 죽어야 할 존재임을 선언한다. 특정의 공동체로부터 또는 다수로부터 배제되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 흠결이 있는 사람들임을 누구나 확연히 알 수 있도록 만드는 낙인이다. 문제는 이러한 딱지 붙이기, 꼬리표 달기가 부당한 목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혐오하거나 배제하고 싶을 때, 그 대상을 인격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뭔가 흠결이 있다고 규정하는 행위가 이루어진다. 동시에 낙인찍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편안히 살고 싶으면 이 사람들을 배격하라”는 경계와 주의를 담은 신호의 의미를 담고 있다.

 

물리적인 표식을 신체의 어느 부위에 장착하는 등의 방법으로 어떤 사람의 부정적 정체성을 부각하고 공격하는 일은 이제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말로써 다른 이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일은 지금도 수시로 벌어진다. 꺼내놓기에도 낯이 뜨거워지고 정신이 아득해지게 만드는 차별과 혐오의 말들이 있다. 어떤 말들이 있는지 열거하는 것은 생략하자. 어쨌든 이들 차별과 혐오표현을 들여다보면, 이 말들이 상대방을 공동체 안에서 소수자의 위치로 몰아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소수자들은 다수를 이루고 있는 ‘선량’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기생하면서 사회를 좀먹거나 위태롭게 하는 부류들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원래 이 사회에서 이들 소수자들은 소외되는 것이 당연하며, 경계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분류된다. 이들이 ‘선량’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한, 이들이 차별받는 것은 당연하며, 동시에 혐오스러운 존재로 굳어진다. 소수자들에게 형성된 부정적 정체성의 규정은 현실의 굴레로 전환되면서 물리적인 힘을 발휘한다. 다른 이들로 하여금 배제당하기 싫으면 배제하는 편에 서도록 강제하면서, 다수에 의한 차별이 공고화되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상대편을 제압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상대를 ‘사회적 부적격자’로 낙인찍는 것은 효과적인 승기확보의 방편이 된다.

 

한국의 역사에서 이러한 성격을 가진 혐오표현의 대표라고 한다면 뭐니 뭐니 해도 “빨갱이”라는 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피로 얼룩진 역사를 유전자에 각인한 채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빨갱이”라는 말은 극도의 공포를 유발하고, 적개심을 고취하는 단어였다. 권위주의 정권과 군부독재가 종식된 후에도 장기간에 걸쳐, “빨갱이”로 규정된다는 건 곧 한국사회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되는 것이었다. 남북 대치가 계속되는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던 자들은 권력이 위태로울 때마다 “빨갱이” 사냥으로 국면을 전환했다.

 

아주 오래도록 민주주의와 인권은 휴전선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고, 꿇려진 이들의 머리 위에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러한 낙인찍기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일제 치하 치안유지법을 모법으로 하는 국가보안법은 1948년 제정된 이래 개악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온존해왔다. 이 법을 근거로 수많은 “빨갱이”가 양산되었고, 그렇게 양산된 수많은 “빨갱이”들이 삶을 파괴당했다. 한번 “빨갱이”로 낙인이 찍히면 본인은 물론 가족과 일가친척, 친구, 동료들이 봉변을 당했고,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며, 대를 이어 연좌의 고통을 감당하기조차 했다.

 

세기와 더불어.png

(사진: 정식 출간된 김일성 회고록 표지)

 

최근 서점가에 김일성 항일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정식 출판된 사건이 있었다. 당연히 “빨갱이”들의 준동을 우려한 ‘애국시민’들의 성토가 있었고, 한 보수단체는 이 책의 판매와 배포를 금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기했다. 그러나 사건을 맡은 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21부는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사항에 대해서는 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지만, 법원이 소위 ‘이적표현물’일 수 있는 서적에 대한 판매·배포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건 충분히 뉴스가 될 만한 일이었다.

 

한편 이 책이 출판된 사실이 알려진 후, 이 정도의 표현물은 허용할만하다는 반응이 정치권에서 나왔다. 의외였던 건 이 책의 출판이 문제없다는 의견을 먼저 표한 쪽이 자유주의 우파라고 볼 수 있는 더불어민주당 쪽이 아니라 흔히 보수로 분류되는 국민의힘 소속 하태경 의원이었다는 점이다. 하태경 의원은 “높아진 국민 의식을 믿고 표현의 자유를 적극 보장하자”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발언이 한국 우익의 수준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이제 “빨갱이”라는 말은 지금까지의 의미나 용도로는 더 이상 활용이 불가능하며 폐기의 수순으로 접어든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잠재된 불씨는 언제든 화마로 변할 수 있는 법이다. 국가보안법이 그 불씨다.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빨갱이”라는 말은 부지불식 간에 또다시 그 본래의 위용을 발휘하면서 한국사회를 공포로 몰아 넣을 수가 있다. 당연하게도 “높아진 국민 의식”은 이러한 사태가 재연되지 않도록 할 것이지만, 국민들이 몸으로 국가보안법에 항거하는 일은 이젠 없어야 한다.

 

1960년, 시인 김수영은 ‘김일성 만세’를 썼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광장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치는 순간 국가보안법 제7조 고무찬양죄의 규정을 위반한 “빨갱이”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된다. 김수영이 발표하지 못할 시를 가슴 안쪽에 써 내려가던 그때와 달리, 지금 시대에 어느 곳에서든 “김일성 만세”를 외친다고 한들 그게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협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까? 한국의 우익 정치인마저 이제는 그럴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청원이 제기되어 있다. 국회법 상 30일 내에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은 청원은 국회 소관위원회에서 심사해야 한다. 청원을 제기한지 불과 9일만에 심사요건인 10만명의 동의가 이루어졌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극악한 혐오표현이었던 “빨갱이”라는 말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던 국가보안법이 이번에야말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지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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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식

한국미래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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