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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적벽대전과 역병

김영문( icomn@icomn.net) 2021.06.14 19:19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은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중국은 한나라 말기에 위(魏), 촉(蜀). 오(吳) 세 세력으로 분립하는데, 그 분립을 결정지은 중요한 전투가 바로 적벽대전이었다. 중원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남쪽 형주(荊州)를 점령하고 유비(劉備)를 격파한 조조(曹操)는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거에 강남 땅 손권(孫權)의 근거지까지 넘보게 된다. 이에 유비와 손권은 연합군을 결성하고 장강(長江) 중류 적벽(赤壁)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을 벌여 조조의 군대를 대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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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우삼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 포스터)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대전의 전 과정을 유비의 모사 제갈량(諸葛亮)이 기획하고 주도했으며, 손권의 장수 주유(周瑜), 황개(黃蓋) 등이 제갈량을 도와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했다고 묘사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은 안개 낀 장강에 풀더미를 실은 배를 띄워 조조 군사가 쏜 화살 10만 대를 거저 얻는가 하면, 추운 계절임에도 동남풍을 불게 하여 화공(火攻)으로 조조의 전선(戰船)을 불태우고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도록 신출귀몰한 병법을 구사한다.

그러나 같은 삼국 이야기를 다룬 소설임에도 『삼국지연의』보다 170여 년 앞서 간행된 『삼국지평화』에는 적벽대전의 디테일이 상당 부분 이와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즉 『삼국지평화』에서는 적벽대전의 작전과 전투를 손권의 장수인 주유와 황개 등이 주도하고 제갈량은 동남풍만 불게 하는 보조 역할에 그치고 있다. 또 『삼국지연의』와 달리 『삼국지평화』에서는 제갈량이 아니라 주유가 장막을 둘러친 배를 타고 가서 북을 울리고 조조의 군사들로부터 화살 10만 대를 얻는 것으로 설정했다.

삼국 이야기의 원전 텍스트인 정사 『삼국지』(陳壽 지음)와 『삼국지 배송지주(裴松之注)』에는 적벽대전의 실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더욱 판이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지(魏志)·무제기(武帝紀)」: “조조는 적벽에 이르러 유비와 싸웠으나 불리했다. 이 때 큰 역병이 돌았고, 군관과 사병 중에 죽은 사람이 많아 군사를 이끌고 회군했다.” 「촉지(蜀志)·유이목전(劉二牧傳)」: “마침 조조가 적벽에서 불리했고, 아울러 역병으로 사람이 죽었다.” 「촉지·선주전(先主傳)」: “선주가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그를 대파하고 배를 불태웠다. 선주가 또 오나라 군사와 함께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 남군(南郡)까지 조조를 추격했는데 당시에 또 역질이 발생하여 북군 중에 사망자가 많았다.” 「촉지·제갈량전」: “조조가 적벽에서 패배하여 군사를 이끌고 업성(鄴城)으로 돌아갔다. 선주가 마침내 강남을 얻었다.” 「오지(吳志)·오주전(吳主傳)」: “각각 1만 군사를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하여 적벽에서 만나 조조의 군대를 대파했다. 조조는 나머지 배를 불태우고 후퇴했는데 병졸들이 굶고 역병에 걸려 사망자가 태반이었다.” 「오지·주유전(周瑜傳)·배송지주」: “뒤에 조조가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적벽 전투에서는 마침 역병이 돌아 과인이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후퇴했소.’” 「오지·황개전(黃蓋傳)」: “건안 연간에 황개는 주유를 수행하고 적벽에서 조조에 맞서 화공책을 건의했다.”

위의 정사 『삼국지』 및 『배송지주』 기록을 읽어보면 놀랍게도 적벽대전은 제갈량의 화살 10만 대나 동남풍과는 관계없고, 화공책도 제갈량이 아니라 황개의 책략이었으며, 승패의 가장 중요한 변수도 동남풍이 아니라 심한 역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조조는 손권에게 보낸 편지에서 역병 때문에 스스로 배를 불태웠다고 언급했다. 흔히 전쟁의 원인과 결과는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조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상대의 기록인 「촉지·선주전」과 「오지·오주전」을 종합해보더라도 당시의 역병이 적벽대전의 승패를 가른 주요 원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의 주요 작전으로 묘사한 화공책은 기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역병 감염 방지 차원에서 조조의 선박을 불태우기 위한 작전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 조조 진영에서 역병 억제와 방제를 위해 스스로 자신들의 배를 소각한 방역 대책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지금부터 1800년 전에 중국의 삼국 정립을 가른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역병이었던 셈이다.

적벽대전의 사례처럼 역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가 직면하는 매우 엄중한 재난의 하나였다. 특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역병으로 인해 사회와 국가가 존립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현대처럼 적절한 치료 방법이나 예방 백신을 개발할 수 없던 그 시기에는 역병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시행했을까?

우선 역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깊이 매장하거나 소각하여 감염의 근원을 차단했다. 또 환자와 접촉자의 옷과 그릇을 삶거나 뜨거운 물에 넣어 바이러스나 균을 제거했다. 아울러 피접(避接)이나 피병(避病)으로 불리는 격리 조치를 강력하게 시행했다. 『진서(晉書)』 「왕표지전(王彪之傳)」에는 “조정 신하의 집에 유행 역병이 돌아 감염자가 셋 이상이면 신하 자신은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100일 동안 궁궐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했다. 코로나19의 자가 격리가 2주임을 상기해보면 당시의 100일 격리는 매우 강력하고 장기적인 방역 대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조선 선조 15년에 경상도 예천의 선비 권문해(權文海)도 『초간일기(草澗日記)』에서 “집안에 역병의 기운이 바야흐로 심해져서 사당에서 차례를 올리지 못했으니 극히 미안한 일이다.”라고 기록했다. 여기에서도 역병 전파를 막기 위해 가까운 친척과의 왕래조차 금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옛사람들이 시행한 이 몇 가지 조치는 목전에도 똑같이 적용하는 주요 방역 대책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런 대책을 뛰어넘어 인류가 과학적으로 개발한 백신으로 가장 강력한 역병 예방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방역 대책을 적절하게 시행하면서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추어 백신 접종도 신속하게 확대하는 중이다. 2021년 6월 14일 현재 1천1백만 명 이상의 국민이 각종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함으로써 역병으로 격리되고 단절된 일상을 복원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몇몇 시행착오와 후유증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하루빨리 집단면역을 달성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과 온기가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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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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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학자. 번역가.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문학박사.

중국 베이징대학 방문학자(한국연구재단 Post-Doc.)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역임.

경북대, 서울대, 한국교통대 등 대학에서 다년간 강의.

저서: 『노신의 문학과 사상』(공저), 『근현대 대구경북 중국어문학수용사』(공저) 등,

역서: 『동주열국지』(전6권), 『원본 초한지』(전3권), 『삼국지평화』, 『정관정요』, 『자치통감을 읽다』, 『문선역주』(전10권 공역), 『루쉰전집』(전20권 공역) 등 3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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