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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여행의가치 5장. 고요함과 웅장함 사이에 서서

테아나우와 밀포드사운드…따뜻한 삶의 온도는 손길

윤창영( ycy6529@hanmail.net) 2025.05.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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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포드사운드 선착장에서 본 피오르드 기수역의 모습>

오늘의 가치 조각

 자연은 나를 보게 하고, 사람은 세상을 보게 한다

 아름답고 웅장한 자연은 나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희생이 아닌 작은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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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제왕 전투씬 촬영지 광활한 평야와 우뚝 솟은 산들의 모습이 웅장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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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거울처럼 비춘다는 미러레이크>

오늘은 밀포드사운드에서 기수역 크루즈를 예약한 날이다. 

테아나우에서 밀포드사운드까지의 거리는 200여km.

밀포드사운드는 뉴질랜드 남섬에서 피오르드 모습을 가까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장소다.

하지만, 그곳엔 숙소가 없어 사실상 캠핑카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최소 2시간 떨어진 테아나우에서 숙박하게 된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2시간 걸리는 테아나우 또는 4시간 떨어진 퀸스타운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우리는 밀포드사운드를 3번 왕복해야 하기에 테아나우 탑10홀리데이파크 도미토리(12인실)로 거점을 잡았다.

테아나우에서 밀포드사운드로 가는 길은 환상적이다. 

이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눈을 황홀하게 하는 장소가 넘쳐 났다.

남섬의 웅장한 속살을 들여다보는 여정. 

우리는 이른 아침, 일부러 일찍 길을 나섰다. 

반지의 제왕 전투 장면이 촬영되었다는 들판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설명이 왜 붙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좌우로 솟아오른 바위산과 그 사이를 흐르는 드넓은 평원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펼쳐졌다.

현실보다 더 환상적인 풍경. 자연은 때때로 사람이 상상한 세계를 능가한다.

매번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런 풍경속에서 우리가 얼마자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전부인 것처럼 우쭐거리는 모습을 비웃는 듯하다.

자연 앞에서, 시간 앞에서 그리고 타인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갖자는 마음을 들게 해주는 이 풍경이 너무 고맙게 느껴진다. 

미러레이크(거울호수)에 도착해서는 또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호수라기보다 고요한 냇물 같은 이곳은, 피오르드 산맥을 물 위에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바람 하나 없이 잔잔한 물결. 그 위에 그대로 비친 산은 말 그대로 '거울'이었다. 그걸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잔잔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무언가를 비출 수 있구나. 

격렬한 감정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평온한 상태에서는 비로소 세상을 다시 비추게 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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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포드사운드에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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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포드사운드에서2.>

밀포드사운드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점점 더 날것이 되었다. 

깎아지른 절벽,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바위산. 

옆에 있던 장 회장님은 "산이 무섭다"고 말한다. 

아름답고 웅장한 것이 반드시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자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을 압도한다. 

우리가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감탄하거나, 겸손해지는 일뿐이다.

유람선에 올랐을 때, 밀포드사운드는 우리를 숨 돌릴 틈 없이 맞이했다. 

출발하자마자 쏟아지는 폭포, 산들의 웅장함, 그리고 태평양을 향해 열린 물길. 

유람선은 바다로 나가기 직전 방향을 돌려 돌아온다.

그 짧은 회항 속에서도, 내가 이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날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만족스러운 하루다. 

그런데, 예상치못한 일이 벌어졌다. 

테아나우로 돌아가려고 차량의 시동을 걸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순간 잘못됨을 직감했다. 

터널을 지날 때 켜두었던 라이트를 끄지 않고, 5시간을 주차한 탓에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다. 

어찌할바 몰라 고민하다 옆에 캠핑하고 있던 이탈리아 커플에게 도움을 구했다. 

먼저 남자에게 도움을 구했는데, 그 역시 영어가 약해 자신의 여친을 불러왔다. 

그녀는 우리의 상황을 듣고, 콜센터 상담원 연결을 위해 번호를 차분히 눌러가며 진행했다.

20여분 그러고 있는데, 그녀에게 샌드플라이(피빨아먹는 파리같은 벌레)가 자꾸 달라붙어 전화하는 동안 그녀를 위해 종이를 이용해 부채부쳐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상담원과의 통화가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우리의 렌트카 긴급서비스는 출발장소가 테아나우여서 여기까지 오는데 2시간 걸린단다. 

장 회장님께 아침에 라이트를 끄지않았던 실수를 계속 사과했다.

이제 2시간동안 샌드플라이가 가득한 밀포드사운드 무료주차장에 멍하니 있어야 한다. 

차량을 쉽게 알아보게 하기 위해 일단 본네트를 열어뒀다. 

본네트를 열고, 그 두 시간을 기다릴 생각에 막막함이 몰려왔다.

바로 그때였다. 

한 트럭이 우리 앞에서 멈췄다. 수상보트를 끌고 온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창문을 내리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배터리가 죽었어요."

배터리 문제라고 하자, 그는 트럭 뒤로 가서 휴대용 배터리를 꺼냈다.

아무 대가도, 질문도 없었다. 그냥 도왔다. 그의 손길 덕분에 차는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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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포드사운드 무료주차장의 모습>

그 순간 나는 너무도 명확하게 깨달았다.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 건 제도가 아니고, 시스템도 아니다. 

그것은 선뜻 손을 내미는 사람의 마음이다. 

이탈리아 커플도 그렇고, 수상택시 운전사분도 그렇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 그 앞에 멈춰 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행위 같지만, 실제로는 그 사회의 온도를 결정짓는 힘이다.

테아나우로 돌아오는 길, 나는 차 안에서 말이 없었다.

장 회장님도 그랬다. 우리는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멈춘 순간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다가갈 수 있을까?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조용히 기도했다. 우리가 만난 이탈리아 커플, 수상보트를 끌고 온 남자, 그들의 손길에 감사했고,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삶에서 종종 멈춘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길이 막히기도 한다. 

그때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큰 무엇이 아니었다.

도움의 손길.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세상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낯선 사람에게 따뜻한 한 사람이 더 많은 사회. 

가수 변진섭이 부른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거죠'라는 가사의 의미가 깊게 다가온 하루였다.

그게 우리가 진짜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그날 밀포드사운드에서 다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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